22개월중 월급은 단5개월, 지음은 무릎손상으로 투병중
"경찰치료비 2천6백만원 지급하라며 내 집 압류" 억울함 호소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공권력의 대처방법에 대해선 이견이 분분하다. 국가기강과 산업평화를 위해선 ‘불법필벌’과 ‘무관용’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반면 노동자에겐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고 사업주에게는 관대했던 만큼 공권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유성기업에서 20년을 근무했던 노동자 최희찬씨는 공권력으로부터 자신이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회사의 업무를 방해하고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 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처벌받은 만큼 공권력이  유성기업의 불법행위를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씨는  공권력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다. 단지 국가로부터 자신이 버림 받았다고 생각한다.<편집자 >

대전광역시 둔산동 지방고용노동청사 앞에 나타난 최희찬씨는 노동부 청사 건물을 둘러보았다. 청사안은 일요일이라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직장동료들이 사업주처벌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는 천막 입구에 한명의 동료가 무표정한 얼굴로 봄볕을 쬐고 있었다. 노동부청사 안 정원에는 개나리가 털빠진 닭 마냥 듬성 듬성 꽃을 피우고 있다.

▲ 최희찬씨는 유성기업 영동공장에서 20년을 근무했다. 큰 아이를 대학에 보낼수 있던 것도 가정을 꾸릴수 있던 것도 다 유성기업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 노조파괴공작을 진행한 유성기업을 처벌하라며 노동자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최씨는 듬성 듬성 핀 개나리는 보이지 않았나보다. 노동부 청사를 짜증이 섞인 눈길로 쳐다본 최씨는 퉁명스럽게 동료에게 한마디 한다. “노동부 이××덜 허수아비 아냐. 뭐하는 데여. 여기 허수아비 하나 만들어 놔. 동네가서 짚풀 한차 싣고 와서 만들어. 허수아비에 ‘노동부’라고 써서 세워 노라고!”

동료도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최씨가 갓 핀 개나리를 무시한 것처럼 그도 최씨의 말을 무시했다. “희찬아. 다시 수술해야 한다매. 왜 그런디야. 뭐가 잘 안되겨” 이번에는 최씨가 동료의 말에 화답했다. “대전성모병원가서 MRI 찍어봤는데 의사가 다시 수술하라고 하네. 안 그러면 나머지 인대마저 끊어진다고. 아주 환장하겠네. 수술하면 또 8개월은 꼼짝 못하는데”

내 가정을 품어준 유성기업 
최씨의 아버지는 양조장을 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변변치 않았다. 사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다섯 남매를 데리고 고향인 영동군 용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가난까지 돌아왔다. 최씨의 누나둘 셋은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만큼 최씨의 아버지는 가난 앞에서 무기력했다. 넷째이자 장남이 최씨는 공업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별로 할것이 없었다. 바로 군대를 갔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이웃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결혼 당시 아내는 이미 임신 8개월이었다. 최씨는 마음이 급해졌다. 급한마음에 고향에 있는 유성기업에 입사했다. 그해가 1994년, 최씨가 스무네살이던 때 였다. 최씨에게 첫 직장인 유성기업은 20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그의 직장이다.

그의 첫 직장인 유성기업은 일이 고되기로 소문났다. 그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한달에 일곱 여덞명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직장 분위기도 거칠었다. 실수를 하면 욕은 기본이고 정강이도 채였다. 일명 조인트를 까는 것이다. 불량이 나온 어떤 때는 작업반장이 몽키스패너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매일 잔업을 하고 토요일 날도 잔업을 해서 첫 월급으로 48만원을 받았다. 최씨는 이 첫 월급을 잊지 못한다. 유성기업에서 받은 48만원 첫 월급을 시작으로 해서 지금까지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이만큼의 가정을 꾸려왔기 때문이다. 큰 애는 지금 벌써 스무살이 돼 대학에 들어갔다. 둘째는 고등학교 2학년. 모두 훌쩍 커 버렸다. 그날 이전까지 유성기업은 최씨와 그의 가정을 품어준 어머니였다.

심야노동과 공권력
2011년 6월 22일. 최씨는 반쯤 미처 있었다. 무섭지도 않았다.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날 오전 최씨와 동료들은 회사가 데려온 용역들로부터 방패와 쇠파이프, 소화기에 무차별로 폭행을 당했다. 경찰이 왔다. 최씨는 용역들로부터 폭행당해 심한 부상을 입었다. 치료가 필요했다. 붕대를 감고 다시 돌아온 공장 앞에서 또 한 번의 충돌이 있었다. 용역은 보이지 않고 경찰과 동료들간의 충돌이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나이 많은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최씨의 손에는 어느새 각목이 들려 있었고 전경들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무장하고 훈련한 공권력을 상대하기엔 그는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했다. 최씨는 자기가 전경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을 바로 알았다. 한쪽으로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보였다. 그쪽으로 무조건 뛰었다. 순간 몸이 공중으로 떴다. 이어 셀수없는 발길질이 최씨의 몸을 짓밟았다. 어느 순간 아프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최씨의 기억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의 양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을 때 였다. 국제암연구소에서 2급발암물질인 ‘심야노동’을 하지 말고 잠좀 잘수 있게 해달라는 노조의 요구가 자신의 구속으로 이어지리라고 최씨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갈비뼈 부러지고 십자인대 끊어져도 치료조차 거부당해
천안경찰서 유치장에 입감된 최씨는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몸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느꼈다. 이 통증으로 최씨는 잠 한숨 자지 못했다. 다음날 그는 경찰에게 호소했다. 이 호소는 묵살됐다. 이런 호소를 계속 반복하고 나서야 체포3일만에 병원진료를 볼수 있었다. 진료결과 갈비뼈 6번과 7번이 부러졌다. 전치4주의 진단이 나왔다. 마침 경찰이 청구한 영장도 기각됐다. 나오자마자 서울에 있는 원진녹색병원에 진료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진료를 보지 못했다. 진료 일정이 잡혀 있는 날 경찰이 구속영장을 재청구한 것이 처리돼 구속됐기 때문이다. 구속된  최씨의 신병은 바로 천안구치소로 옮겨졌다.

최씨의 통증은 악화됐다. 이제 가슴뿐만이 아니라 다리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통증은 계속 됐고 하루에 30분만 허용되는 운동도 할 수가 없었다. 구치소 측에 병원측에 진료를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구치소는 최씨의 요청을 거부했다. 오랜 기간의 실갱이 끝에 병원 진료를 보게 됐다. 이번에는 무릎십자 인대가 파열됐다는 결과와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구치소측은 이번에도 “재정이 부족해 수술을 시켜 줄 수가 없다”며 거부했다. 구속노동자후원회라는 단체가 집회도 하고 항의 해서 최씨가 수술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병원진료를 보게 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사가 조건을 달았다. 담당의사는 십자인대 파열 수술은 재활과정이 중요한데 재활치료를 할수 없는 수술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구치소는 이 의사의 말에 허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구치소 교정인력 형편상 재활치료를 허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의사는 최씨의 수슬을 거부했다. 최씨는 12월 28일 보석으로 석방됐다. 국가의 관리로부터 신병이 자유롭게 되어서야 최씨는 그때서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구속 기간 동안 최씨는 구치소에서 햇살 한줌도 안지 못했다. 아픈 다리 때문에 30분인 운동조차 하지 못했다. 수감자들이 유일하게 햇볕을 대하는 기회조차 갇질 못한 것이다. 
 
가정, 삶의 균형이 무너지다
그동안 받았던 월급을 모으고 퇴직금 중간정산을 통해 최씨는 지금의 아파트를 마련했다. 지금 이 아파트 등기부등본은 누더기가 됐다. 경찰이 이 아파트를 상대로 2600만원의 압류를 걸어놓았다. 최씨가 공권력에 대항해 행사한 불법 행위로 기물이 파손되고 전경대원이 부상을 당해 입은 치료비등을 명목으로 압류한 것이다. 경찰은 유성기업 노동자등 127명을 대상으로 1억2천여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다.
최씨는 파업을 시작한 2011년 5월 이후로 지금까지 22개월 동안 딱 5번의 월급을 받았다.  최씨는 구속된 상태에서 2012년 8월까지 휴직계를 냈다. 휴직이 종료된 그때부터 유성기업은 그를 복직시키지 않았다. 대신 ‘자택대기’라는 인사명령을 냈다. 기묘했다. 월급은 줄테니 출근도 하지 말고 집에서 있으라는 것이다. 월급은 기본급과 상여금등 고정급만 지급됐다. 당연히 평상시보다 줄었다. 이 자택대기 명령은 올 2월까지 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회사는 복귀시키지 않았다. 대신 ‘정직 3개월’의 징계를 했다. 월급은 당연히 무급이다.
최씨가 구속 수감되었을 때 미대진학을 꿈꾸던 고등학생이던 아들이 편지를 보냈다. “아빠. 나는 그림을 단순하게 그림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어요. 힘들 때 쉬어가는 놀이터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제 그림을 내려놓을 거에요...... 아빠, 힘내세요”
최씨는 수감생활중 가장 어려웠던 것이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이다. 최씨가 모시고 살던 어머니는 오랜 기간 폐질환으로 투병생활을 해오던 중이었다. 최씨는 구속당시 어머니 임종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두려웠다. 그리고 그가 보석으로 석방된지 얼마 되질 않아 어머니는 떠났다.
아내의 삶도 바뀌었다. 최씨의 아내는 장례식장 도우미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달에 기껏해야 10일정도 일한다. 이렇게 2011년 6월 이후로 최씨의 아이들의 진로와 어머니의 건강, 아내의 삶이 보든 것이 바뀌었다. 최씨의 등기부 등본도 기록사항이 추가됐다. 4천여만원의 담보대출 내역도 추가로 자리했다.

공권력은 강자에게만 관대
최씨는 ‘자택대기’를 하는 동안 건설 현장 일이라도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다. 문제는 아픈 다리였다. 힘조차 제대로 줄수 없는 다릴 가지고 건설 현장일을 할 수는 없었다. 운동을 하면 다리에 근력이 붙을까 하는 생각에 이틀 동안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금새 포기했다. 근력은커녕 통증만 심해지고 안쪽으로 다리만 더  오그라들 뿐이다.
최씨는 억울했다. 이 모든 것이 제때에 치료와 수술만 받았어도 생기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변 동료들과 상의한 끝에 국가인권위원회에 경찰과 천안구치소를 제소했다.    

최씨의 제소에 대해 국가 인권위원회는 끝내 받아들이질 않았다. 인권위는 경찰이 최씨에게 폭력을 행사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최씨에  대해 구속영장이 재청구되었을 당시 제출된 몇백장의 사진은 있었지만 최씨에게 유리한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제출되지 않은 것이 맡다. 국가인권위는 구치소와 관련한 일과 관련해서도 “구치소가 외부 병원 검진 기회를 제공했고 수술자체는 보장해 주는 기본적인 치료기회를 박탈할 것으로 불수 없다”며 최씨의 제소를 기각했다.

이제 최씨는 더 이상 정부와 공권력을 믿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그를 지켜주는 공권력은 없다는 걸 눈으로 봤다고 생각한다. 최씨에게 공권력이란 힘있는 사람에게만 관대한 집단이다. 동료 노동자들에 대해 행한 해고가 부당하다고 해도 복귀시키지 않는 유성기업을 처벌하지 않는 검찰이나 노동부는 더 이상 공공의 권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최씨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이요. 에라이. 힘있는 사람과 자본의 공산당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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