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서문동 무심천가~ 차부~ 청주기계공고 거쳐 30분 걸어
등굣길 국기게양식, 터미널 약장사, 무심천 버드나무 그네 추억담

<장소의 기억, 청주를 묻다>
이 글은 박순원님의 허락을 받아 '충북작가' 34호에 기고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시인 박순원
충북 청주 출생. 2005년 『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수상. 시집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 『주먹이 운다』.

서문동 오거리에서 성안길로 통하는 속칭 족발골목 입구에 옛 청주 읍성 서문터 표석이 있다. 청주읍성 서문인 청추문(淸秋門)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이른바 시구 개정사업으로 헐리었다고 한다. 중심가인 북문로, 남문로와 마찬가지로 서문동도 읍성이 있던 시대의 청주를 반영한 지명이다.

나는 서문동에서 태어났고, 초·중·고를 모두 서문동에서 다녔다. 이후로 서울에서 한참을 살았고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지만, 지금도 부모님이 서문동에 계시고 늘 마음속으로 의지하고 있으니, 아직도 나는 서문동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주성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우리집은 서문동의 맨 끝자락 남주동과 맞닿은 무심천 가에 있었으니 친구들 중에서는 좀 먼 길을 걸어다닌 편이다. 지금은 없어진 서문동사무소, 향군회관 앞을 지나 서문다리 쪽으로 나가 서문제과(현 서문우동) 앞을 지나서, 지금 홈플러스가 들어서 있는 고속터미널을 돌아 큰길을 건너 청주기계공고를 지나 한참을 더 가야 학교에 다다랐다.

지금 홈플러스 자리에는,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 때는, 차부라고 불리던 시외버스정류장이 있다가 사직동으로 나갔고, 이후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와 꽤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둘 다 가경동으로 멀찌감치 빠져나갔다.

등교는 대개 삼십 분쯤 걸렸다. 길도 복잡하지 않았고 천천히 걸어가다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청주기계공고 앞에 이르면 길이 부산해졌다. 공고생들은 덩치도 크고 수도 많아서 학교 앞길을 꽉 메웠다. 정문 앞에는 선도부와 학생주임 선생님들이 버티고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와 구멍가게에서, 집에 놓고 온 교련복 앞가리개, 각반 등을 구입해서 급히 복장을 갖추는 형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자기들끼리 킬킬거리며 서둘러 교복 단추를 다는 경우도 있었다. 거의 매일 공고 정문 앞 어름에서 국기게양식에 걸렸다. 모두가 멈춰서 사위가 조용해지고 애국가만 흘러나왔다. 거수경례를 붙이고 있는 기계공고생의 왼쪽 팔에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 마크가 선명했다.

서문다리에서 청주대교 쪽으로 나가 신호등을 건너가기도 했다. 지금 신한은행 자리(그 전에는 충북은행 본점 자리)에는 둑 아래 한참 밑으로 정구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충북은행 본점을 지을 때, 지하를 따로 판 것이 아니라 그 둑 아래의 공간을 지하로 삼은 셈이다. 충북은행 본점이 처음 지어질 때, 청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위용이 대단했다. 그때는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친구들과 그 건물을 바라보며 규모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던 기억이 있다.

▲ 1970년대 청주시 육거리 일대 전경

청주대교를 지나 상당공원에 이르는 사직로는 예나 지금이나 청주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하고 큰 도로다. 항상 차가 많았는데 신호등이 생기기 전에는 교통경찰이 수신호로 차량을 통과시켰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사거리 한옆으로 사방에 말뚝을 박아 새끼줄을 쳐놓고 교통 위반한 사람들을 한참씩 가둬놓는 벌을 세우곤 했다. 가끔 정장차림의 신사 숙녀 몇 분이 서 있기도 했다.

주성국민학교에서 기계공고를 거쳐 사직로에 이르기까지 길을 따라 개천이 있었다. 도시 하수를 받아내는 시궁창에 가까워 몹시 더러웠지만 규모는 꽤 컸다. 지금은 복개되어 공영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주성국민학교도 기계공고도 다리를 건너 학교로 들어갔는데, 그 다리 위가 기계공고는 선도부로부터 주성국민학교는 주번 선생님으로부터 학교 진입을 점검받는 자리였다.

하굣길은 하염없이 늘어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볼거리가 많았고, 친구 집에서 한참을 놀다가기도 했다. 학원도 없고 과외도 없던 시절이니 대개 어둡기 전, 저녁 먹기 전까지만 집에 들어가면 큰 문제가 없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청주시립도서관이 중앙공원 옆(지금 청주예술단체들이 입주해 있는 건물)에 있었는데, 입장료가 3원이었다.

남문로에서 옷장사를 하시는 친구 어머니께서 20원을 주시면, 공원 앞에서 달고나를 하나씩 해먹고 도서관에 갔다. 달고나와 뽑기는 3원, 국자에 개서 대나무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은 5원 했으니 정말 풍족한 용돈이었다. 한동안 그 친구와 함께 다녔다.

가끔 청주기계공고에서 축구경기가 있었다. 운동장이 무척 넓어서 축구장 세 면을 만들어 경기를 진행했다. 평소에도 넓어보였지만, 가로로 꽉 차게 축구장 세 면을 그려놓으면 더 넓게 보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사회인 축구팀이었을 것이다. 선수들이 연세도 좀 있으신 아마추어들이었는데 진지하게 뛰었고 승부욕도 무척 강했다. 주심, 선심, 선수 다 옷을 갖춰 입고 오프사이드까지 있는 정식 경기를 거의 보지 못한 터라 정말 재미있게 구경했다.

한번은 하프라인쯤에서 높고 길게 찬 공이 골대로 그냥 들어갔는데, 골키퍼가 햇빛을 마주보고 있어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허망해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까지 간 경기가 있었다.

한 키커가 골대 밖으로 실축을 했는데, 심판이 ‘자신이 호각을 불지 않았는데 임의로 차서 무효’라고 선언하자, 상대편에서 키커의 잘못이고 또 골키퍼가 막은 것도 아니고 밖으로 찼으므로 무효가 아니라고 몰려들어 항의하던 장면도 떠오른다. 어린 마음에도 참 판단하기 어려운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가방을 들고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을 했다.

▲ 1972년 청주시 무심천 대교와 시내 전경

하굣길 구경거리 중 단연 압권은 약장사였다. 지금 홈플러스 자리에 시외버스정류장 그리고 고속터미널이 있을 때에는 그 동쪽으로 도로 건너편이 공터였다. 터미널 근처라 교통이 편하고 유동인구가 많아서 그런지 약장사가 단골로 자리잡는 곳이었다.

각목에 커다란 돌멩이를 묶고, 그 각목을 외발처럼 세워놓고 이목을 끌던 약장사가 있었다. 큰 돌멩이가 각목에 의지해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는데, 그 각목을 외발삼아 콩콩 뛰어가는 시범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범은 끝내 보지 못했다.

어린남자 아이 콧기름을 손가락에 묻혀 자주색 보자기에 집어넣었다 꺼내면 앞면에 세종대왕 뒷면에 한국은행이 그려진 백 원짜리 지폐가 한 장씩 척척 나왔다. 여자아이 콧기름을 묻히면 돈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 콧기름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아이 놓고 돈이나 꺼내지 왜 나왔냐고 하시는 분들 있는데, 다 눈속임입니다. 정말 돈이 나오면 저도 집에서 돈이나 꺼내고 있지요.”라고 떠벌리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아저씨는 아기의 씨가 있어서 아저씨고 아주머니는 아기 주머니가 있어서 아주머니”라고 했던 말도 기억난다. 그 말을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했더니, 부엌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께서 한참을 웃으시며 별 싱거운 놈의 약장사도 다 있다고 말씀하셨다.

서문다리 옆 무심천 뚝방에도 약장사가 자주 자리를 잡았다. 공터가 비교적 넓어서 터미널 옆보다 규모가 큰 약장사가 들어섰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누나들이 농악대들이 입는 옷을 입고 공연을 도왔는데, 메인 약장사가 “친구들은 학교 다니는데 시집갈 때 요강 하나라도 자기 힘으로 마련해 가려는 기특한 아이들”이라고 소개했다. 그 말을 할 때 누나들은 머리를 맞대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붕대를 감은 왼손에 칼을 통과시키는 것이 가장 큰 묘기였다. 미리 칼로 각목을 쓱쓱 베어 보여주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 묘기가 어떻게 가능한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무슨 약을 팔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약을 먹을 때 뭐든 다 먹어도 좋지만 개고기만은 금물이라고 했다.

스님들이 부처님 앞에서 하나하나 정성껏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곽을 뜯어보면 은은하게 향내가 난다고, 그러니 개고기만은 절대 삼가달라고….

하굣길은 정말 길었고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한동안은 하교하자마자 라디오 연속극 ‘마루치아라치’를 들으러 가까운 친구 집으로 우르르 몰려 뛰어갔다. 막 뛰어 친구 집에 닿아 라디오를 켜면 금방 ‘마루치아라치’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파란해골 십삼 호 납작코가 되었네” 끝나면 그날 나온 내용에 상상력을 더해 각자 각자 시연에 들어가 묘기를 부렸다. 함석지붕이 낮았던 친구 집 좁은 마당에서 족보도 없는 태권 시범이 펼쳐졌다.

무심천 뚝방 위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서 냅다달려 그네처럼 타고 노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냥 구경만 했다. 허공을 가로지를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 버드나무들은 봄에 꽃가루를 날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고 어느 날 한 순간에 다 잘려나갔다. 나름대로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들이었는데…….

한 십 년 전 아내가 주성초등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고 아내는 서문동 본가에서 나의 국민학교 시절 등하굣길을 똑같이 걸어서 출퇴근을 하였다. 큰아이는 막 돌을 지났고 뱃속에는 또 아기가 있었다. 걸어다니느라 무척 힘들었다고도 하고, 걸어다닌 덕에 적당히 운동이 되어 둘째를 쉽게 낳았다고 하기도 했다.

일요일 일직이었을 때 점심을 날라 준 적이 있었다. 교무실에서 유리창 앞에 가만히 서서 운동장을 내다보았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바라본 학교 풍경과 너무도 달랐다. 흡사 남의 학교에 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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