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업 50대 노동자 A씨, 노사분규 우울증으로 자살
파업이탈해 구사대로 활동했지만 산재신청 거부한 회사

지난 4일 창조컨설팅이 노조파괴 공작을 진행해온 유성기업에 소속된 50대 노동자 A씨가 1년 넘게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는 작년 5월 노조의 파업에서 이탈해 공장에 복귀한 뒤 하루 평균 열두 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했고, 노사 갈등이 악화된 뒤에는 쇠파이프와 삼각대로 무장한 채 구사대로 동원됐다.

▲ A씨는 공장에 복귀한 후 구사대로 활동하며 정신적 고립감과 과도한 노동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 파업현장에서 부상당한 노동자. 동고동락한 동료들에 대한 폭력은 A씨에게도 큰 심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우울증세를 보였다.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는 8월에 “파업 복귀 후 직장 내에서의 장기간 근로와 구사대 동원, 공장 내에서의 고립 등으로 인한 우울증세, 불안, 초조 불면 등이 발병한 것”으로 보고 A씨가 제출한 산재요양보험신청을 승인했다.

하지만 A씨는 산재요양신청이 승인되기까지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산재승인 후 근로복지공단의 입원치료가 중단되자 마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이 그렇듯 언제나 죽은자는 말이 없다. 대신 살아남은 자들은 그 몫만큼 더 고달프다. 유성기업 노조 홍종인 아산지회장은 아산공장 앞 굴다리 난간에서 5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A씨가 죽던 날, 그 소식을 들은 홍 지회장은 밑에 있는 동료에게 소주 한병을 올려달라고 했다.

동료들은 소주 반병을 올려보냈다. 행여 또 다른 죽음의 불안감에 밤새 촉각을 곤두세웠다. 유성기업 노조 150명을 대상으로 심리건강을 살펴본 결과 절반 이상이 심각한 불안증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대체 유성기업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노사분규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2011년 5월 27일, A씨는 유성기업 상무 J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유성기업 노조의 파업 때문에 현대자동차 라인이 멈춰 회사가 존폐위기에 내몰렸다는 것이다. 그는 파업대열에서 벗어나 현장으로 복귀하기를 결심했다. 사장과 공장장은 A씨와 함께 복귀한 48명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상무 J는 “회사가 해줄수 있는 모든 혜택을 1차복귀자에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현장에 투입됐다. 퇴근은 없었고 회사내에서 숙식을 하며 밤 11시까지 일을 했다. 노조 조합원들과 구분되는 두건을 회사로부터 지급받았다. 공장장의 방송지시가 있으면 구사대가 되어 정문에 배치됐다. 비상 사이렌이 울리면 쇠파이프와 삼각대로 무장을 한 채 조합원과 대치했다. 야식 및 주류 배급, 취침과 구사대 지시, 대피 등은 모두 과단위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노사분규가 아니라 전쟁이다!” A씨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진 걸까? 작업 3주차 어느 날 오전부터 전경차량과 물대포 등이 공장 앞에 배치됐다. 이전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공장을 감돌고 있었다. A씨는 회사의 지시로 평소와 달리 한두 시간 일찍 작업을 마쳤고 현장의 문을 모두 잠그고 한 곳으로 모였다.

밤 9시경 정문에서 물대포와 방패, 곤봉을 든 전경들과 조합원이 충돌하는 것이 보였다. 옥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본 A씨는 몇 십년을 동고동락한 직장의 선후배, 학교 선후배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느 편이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적었다.

파업동료와 맞선 후 불면증 시달려

그날 이후 불면이 시작됐다. 탈의실에 스티로품을 깔고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공장밖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복귀 후 한달 만에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출퇴근 과정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정문 앞 대치상황을 피해서 도둑질 하듯 출퇴근을 해야 했다. 공장 밖으로 나왔어도 불면의 밤은 계속됐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A씨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회사의 근태기록부를 보면 A씨는 2011. 5. 29. 밤 회사에 복귀하여 그 다음날인 5월 30일부터 7월 19일까지 단 이틀만을 제외하고 49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5월 30에는 아침 08시 30분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15시간 30분, 5월 31에는 12시간 30분을 작업했다. 6월에는 연장근로만 109.5시간에 달해 거의 살인적인 노동 시간이었다.

정신적 고립, 과도한 노동에 자살 시도

A씨는 이미 정신적, 육체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고립된 상태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 구사대 역할로 인한 자괴감과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등이 더해졌다. 대치상황 목격, 주변 동료들의 냉랭한 시선, 생산량이 적다며 신청인을 몰아세우는 소속 부서장과의 갈등, 자신의 어려움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상황 등으로 불안과 불면, 초조, 우울 증세가 심해졌다.

A씨는 2011년 8월 8일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집 베란다에서 빨래 건조대에 넥타이를 묶고 시도했다. 12월 12일에는 공장 탈의장에서 부인에게 갑자기 죽겠다며 전화를 하는가 하면, 이틀 뒤에는 집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는 등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 시도 이전에 병원도 찾아갔었다. 2011년 7월 22과 23일, 평택 소재 굿모닝병원에서 불면증 등으로 입원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정신과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 곧장 퇴원했다. 첫 번째 자살 시도 다음날인 2011년 8월 9일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병원을 찾았다. 평택 소재 윤신경정신과의원에서 ‘중증의 우울성 에피소드’ 진단을 받았다.

산재 승인조차 협조 않은 회사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가족들은 9월 6일 근로복지공단에 적응장애로 인한 산재요양신청을 했다. 그러나 회사는 협조하지 않았다. A씨의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고 회사와의 연관성을 일절 부인했다. 결국 산재요양신청은 업무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됐다.

이 과정에서 A씨의 부인은 회사의 이런 태도에 심한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남편을 대신해 노동조합을 찾아와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근로복지공단앞에서 수개월동안 1인 시위도 진행했다.

이후 A씨는 산재요양승인신청을 다시 했고 1년이 지난 올 8월에야 산재신청 승인을 받았다. 이후 A씨는 단국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원으로부터 “입원기간 2개월이 경과됐기 때문에 더 이상 입원이 곤란하니 통원치료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가족들은 A씨의 상태가 워낙 중증이여서 다른 병원을 알아봤다. 입원치료가 가능한 다른 병원을 수소문 끝에 찾아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거부했다. 산재지정병원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집으로 돌아온 A씨는 가족들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유성기업에 입사한지 32년, 그리고 파업이 벌어진지 18개월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가 죽은뒤 노조는 ‘창조컨설팅과 회사 그리고 자본 편향적인 정부’가 만들어낸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회사는 늘 그래왔듯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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