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섬진강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산과 들, 강의 여백은 은은하여 어디를 보나 마치 고향마을인 듯한 아늑함이 있다.

차는 섬진강을 따라 달렸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하동포구 갈대는 내 할머니, 내 어머니의 모습이다. 시린 겨울 내내 핏기 잃어 간 하얀 손을 차가 모퉁이를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마냥 흔들고 서 있었다.

강마을 어귀에 서 있는 둥구나무, 파란색, 빨간색 스레트 지붕 위로 훌쩍 키를 키운 포플러, 흙 담벼락을 간신히 넘겨다보는 앵두나무, 이제 막 꽃 진자리 눈물처럼 맺힌 매실이 아롱거리는 강마을은 어디선가 본 듯한, 아니 오히려 너무도 익숙한 고향마을 같다.

지금 당장 차에서 내려 그 곳으로 달려가면, 누군가 낯익은 얼굴들이 맨 발로 뛰어 나와 반갑게 맞이해 줄 것만 같고, 어릴 적 같이 뛰어 놀던 동무들이 있을 것만 같다.

섬진강에 배꽃지고 맺힌 열매, 세월 따라 익어 갈 때쯤이면 이 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좋겠다. 눈 쌓인 한 겨울, 그들의 어머니는 고향을 찾아 올 자식들을 위해 단물이 뚝뚝 듣는 사근사근한 배를 준비하고 기다릴 것이다.

이렇게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 사랑을 알아가며 그리움을 키워가던 곳이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다. 삶에 지쳐 쉬고 싶을 때, 가끔은 그 곳으로 달려가 응석도 부리고 투정도 쏟아내면, 거칠지만 따스하게 보듬어 주던 어머니의 손맛이 있었다. 마냥 아늑한 고향의 품은 타향살이의 곤고함을 끌어 내리고 누운, 어머니 품이듯 포근하리라.

강바람 흐느끼는 섬진강 강둑엔 빈 의자 하나 놓여 있다. 그 곳에 무채색 고된 여정 뉘이고, 굽이치는 강물에 등짐 풀어 헹궈내고, 세상의 분진 묻혀온 손도, 발도, 귀도, 눈도 씻어 내리고 가만히 앉아 귀 기울이고 있으면 강물의 맥박소리 어머니 음성처럼 나긋나긋 들려온다. 그것은 아마도 세월 속에 두고 온 머나 먼 고향의 소리일지 모른다. 어린 시절 정붙이고 추억 쌓아 일구어 놓은 고향의 뙈기밭은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리움만 키워간다. 누군가 내게 그리움을 물어 오면 석양에 물비늘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줄기라 말하리라.

산마루 끝에 잠시 머물러 섬진강에 내리는 노을빛이, 텅 비어가는 하루를 돌아보는 마음으로 저토록 장엄하다. 역류 할 줄 모르고 흐르는 강을 따라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그럴 땐 온 몸의 것들이 모두 다 빠져 나가는 것만 같다.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시간이 안타까워 노을은 저리도 붉게 타오르고 강물의 흐느낌은 끝내 여울이 되었다.

무심한 저 강은 어디로 흘러가는걸까?

육정숙 님은 푸른솔 문학회원이며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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