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혜 영(30 강서동 주부, 회사원)

영어 할 줄 알아?

어느 날 사무실에 외국손님이 방문했다. 나의 상사로 계시는 교수님과 함께였다. 업무상의 방문도 아니었고, 나에게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외국손님의 방문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몇 마디 간단한 인사말을 한국말로 나누고 나자 그 외국손님 앞에서 나는 이내 벙어리가 되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일에 열중하는 척 하는 나에게 교수님께서 물으셨다.

"영어 할 줄 알아?"

나는 당연히 영어를 할 줄 몰랐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못한다고 말했다. 외국손님이 주눅 든 것이 확연해 보이는 나에게 미소를 던진다. 나는 어떻게 답례를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교수님을 향해 묻는다.

"커피 드릴까요?"
 교수님은 좋다고 말씀하신다.

'외국손님께도 물어야 하는데……'
더 큰 난관에 부딪치고야 말았다.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말하지? …… 에라, 모르겠다.'

 "커피? 커피…드릴…까요?"
다행스럽게도 외국손님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사무실에 믹스커피 밖에 없다.  취향을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커피를 타서 교수님과 외국손님 앞에 놓고 재빨리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괜히 일에 열심인 척 한다.

교수님과 외국손님은 간헐적으로 대화한다.  영어로 말했으므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모른다. 

 혹시라도 나에게 말을 시킬까 두려운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마침내 교수님과 외국손님이 일어선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님과 외국손님을 배웅한다.

문을 열어주자 외국손님이 커피 고마웠다고 말한다. 

 어떨결에 나는 대답한다.
"감사합니다"라고.

친절하게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선 후에야 깨닫는다.

 "Thank you"라고 말했을 때에는 "You are welcome"이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며칠 후 동료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사건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래서 자괴감이 느껴지더라. 영어를 10년 가까이 공부해 놓고 그런 간단한 대화도
  못  하다니!"
무심히 듣고 있던 동료가 말한다.

"뭐 그까짓 걸 가지고 자괴감까지 느껴. 외국사람이 우리나라 오면 당연히 우리나라 말을 해야지. 네가 외국 나가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한국말로 상황에 맞게 잘 대응했네."
순간 또 다시 부끄러워진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부끄러워했던 이유는 내가 외국손님의 물음에 적절히 대답하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정작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외국손님 앞에서 미리 주눅 들어 외국손님에게 성실한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일 텐데 말이다.

 "궁하면 다 통해. 말로 안되면 몸으로 하면 돼. 다 사람인데 안 통하는 게 뭐가 있어!"
모듬전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며 동료는 말한다.

그래 맞다.
나는 오히려 외국손님 앞에서 말이 너무 많았다.  미소로 말했으니 그저 미소로만 답하면 될 것을.

또 생각해 보면 내 대답이 영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타 준 커피에 대해 고마워하는 외국손님에게 내가 타 준 커피를 맛있게 마셔 줘서 고맙다고 얘기했으니 말이다.

또한 나는 매우 친절하기까지 했다.

내가 잘 할 줄 아는 한국말로 성심을 다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예전에, 소설가 복거일 씨의 '영어 공용화론'에 대해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며 심하게 성토한 적이 있다.

서른살이 넘도록 영어공부를 애써 해 본 적도 없고,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껴 본 적도 없으며,  영어를 못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이나 열등감을 느껴 본 적도 없다. 당연히 영어권 국가(특히 미국)에 대해 사대주의적인 태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왔고.

 나는 그것을 자부심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외국손님의 방문으로 모든 거짓과 위선이 백일하에 드러나고야 말았다.
정작 나는 영어를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감을 '주체성'이란 가면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주체성을 방증해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나는 나의 편협한 억지 주장으로 나의 무지를 또 한번 과시했을 뿐인 거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새로이 영어를 배울 생각은 없다. 동료가 말한 대로 말로 안되면 몸으로 하면 되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내 나라 말을 더 열심히 배울 것이다.
그리고 내 나라 말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그것을 누구보다 적절히 잘 사용할 수 있음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할 것이다. 
영어 못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닌 것이다.

 다만 부끄러운 건, 다른 이유를 갖다 붙여 못하는 것을 억지스레 가려보려고 하는 가식적인 태도인 것이다.

다시 내게 외국손님이 찾아온다면 나는 더 밝은 미소로, 더 큰 목소리로, 더 명확한 한국어로 외국손님을 친절하게 맞아 줄 것이다.

비록 말은 이해하지 못해도 내가 자신을 향해 건네는 호의는 충분히 받아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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