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통령 노벨평화상 한국인 첫 영광 -미평시절 재조명

청주교도소 뒤늦게 김대통령 독방 언론에 공개
옥중서신 3개월간 무려 640통에 달해 '눈길'
얼굴없는 후원자들 이희호여사 옥바라지 도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 특히 북한과의 평화ㆍ화해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된다' 김대중대통령을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노벨 평화상위원회의 전정발표문'일부 내용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신장,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두가지 공적사항을 인정한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은 김대통령 취임이후 일관성있게 추진한 햇볕정책'의 결실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에 성공, 국가정책의 최고책임자로써 일궈낸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의 공적은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탄압과 고통을 겪으며 터잡아온 것이다.

김대통령이 음지에서 겪은 고통의 흔적은 청주에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지난 80년 5공 신군부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 독방에서 2년동안 수감생활을 한 것이다.  '충청리뷰·는 지난 98년 1월 24일자(제18호)에 김대통령의 청주 수감생활을 발굴취재한 바 있다. 당시 이희호여사의 면회를 은밀하게 도와주었던 지역인사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DJ의 미평시절' 을 재조명했다.  취재과정에서 교도소측이 김대통령의 독방 사진촬영과 당시 계호근무자에 대한 인터뷰 협조를 거부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좌변기는 '특별' 설치
하지만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소식과 함께 청주교도소가 뒤늦게 'DJ독방' 을 언론에 공개했다. 신군부의 사형선고ㆍ무기징역 감형- 5공정권에 의한 미국망명으로 이어지는 '인동초 " DJ의 미평시절을 사진과 함께 되짚어본다. 80년 11월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대통령에 대해 고등군법회의 항소심에서 사형을 확정했다. 이듬해 1월 23일 대법원 신고가 기각됐고 군교도소에 수감중이던 김대통령은 곧장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79년 개소이래 가장 큰 '손님'을 및게 된 청주교도소는 병사(病숨)1층 복도에 차단벽을 세우고 3개의 독방을 분리시켰다. 김대통령은 0.96평짜리 3개의 독방중에 가운데 방에 수감됐다. 딱딱한 나무침상과 투박한 책걸상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창쪽 귀퉁이에 좌변기가 설치됐다. 당초 재래식 변기였기 때문에 고관절부상으로 다리가 불펀한 김대통령에게는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결국 민주당 이용희고문(보은옥천영동지구당 위운장)이 교도소측에 특별히 당부해 좌반기로 바꾸었다는 후문이다.

▶이여사 고속버스 면회길
이희호여사는 주말마다 면회를 왔으나 월 1회밖에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치금, 책, 물품을 영치시키고 돌아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김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의원까지 대전교도소에 구속수감됐기 때문에 이여사는 청주, 대전 두곳에서 옥바라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청주에서 이여사의 옥바라지를 도맡아 지원한 주인공은 이한준옹(78ㆍ충북도 불교신도회장, 전국신도희 수석부회장)이다.

20여년간 청주의 야당 정당인으로 활동해온 이옹은 70년 신민당 전당대회때부터 김대중후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여사가 처음엔 승용차를 타고 면회를 왔었는데, 얼마 안지나서 고속버스를 타고 다녔었요.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럴때니까. 누가 얼굴을 내밀고 도움을 주기가 어렵지 않았겠어요? 언젠가는 한 겨울인데 코트도 못입고 추위에 떠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내가 오헌식씨(전 충북레스링협회장)와 상의해서 코트를 맞춰드린 적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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