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 연규상

1_4월 11일로 예정된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한덩치는 갑자기 쓰러졌다. 코치진이 미처 손쓸 겨를도 없었다. 불어난 체중 때문에 무릎관절과 척추는 이미 거덜난 상태였다. 애당초 혈압과 당뇨, 고지혈증 수치가 높은 몸이었다.

하지만 그가 쓰러진 결정적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일명 디독스 게임. 한꺼번에 ‘클릭질’을 많이 하면 상대방 컴퓨터에 과부하가 걸려 오작동을 일으키는 원리를 이용한 게임이었다. 두 달 전 같은 체육관 출신 선수의 판정을 조작하기 위해 심판의 컴퓨터와 연결해 밤새워 디독스 게임을 벌이며 과로를 한 게 결정타였다. 한덩치 선수는 피시방에서 허혈성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왔다.

어차피 4월 경기는 힘들다는 게 대세였다. 무지막지한 체중으로 상대를 깔고 뭉개 시간을 때우는 한덩치의 공격 스타일에 관객들은 이미 지쳐 있었다. ‘한물갔다’는 말이 안팎에서 새어 나오던 참이었다.

다만 4월 패배를 기점으로 위기감을 고조시킨 뒤 관장을 맡아 측근으로 코치진을 갈아치우고 12월에 치러지는 연맹회장선거에 나서려던 닥터 박의 은밀한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게 내심 안타까웠다. 너무 일찍 나섰다가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닥터 박을 따르는 사람들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왕이 중병에 걸렸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명의나 천하의 충신이라 하더라도 가볍게 나서지 않는 법입니다. 교활한 조정의 대신들은 왕이 죽기 임박해서야 정적들로 하여금 탕약을 올리도록 부추길 것이고 왕이 죽으면 그 책임을 정적들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닥터 박은 생각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지금 조정의 부름이야말로 독배일 것이다. 지금 길을 나선다면 잘해도 죽고, 못해도 죽는다….

하지만 격투기 전문 매체와 한덩치 팬클럽회원들은 눈치 없이 닥터 박이야말로 차기 관장을 맡아 위기를 극복할 적임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체육관 내부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해 일부 젊은 코치들은 관장을 교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장은 버틸만큼 버티다 역부족임을 절감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닥터 박은 난감했지만 더이상 침묵하거나 물러설 수도 없었다.

닥터 박은 비상대책 관장직을 수락하고 체육관에 나와 「응급소생위원회」를 구성했다. 급한대로 경험많은 심혈관 전문의로부터 20대 성형외과 전문의에 이르기까지 의료진 10명을 불러 모았다. 한덩치 선수의 뇌혈관 협착이 심해 마비가 상당히 진행된데다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온 가족력까지 있다고는 해도 소생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잘만 하면 관장 자리를 유지하면서 연맹회장까지 얻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었다.

닥터 박은 병실에 외롭게 누워 있는 한 덩치 선수를 찾아갔다. 만신창이가 된 한덩치 선수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미련한 놈…! 애증 섞인 회한이 가슴 깊이 스며 들었다.


그는 돈거래의 혐의을 덮으려고 엄한 연맹회장 탄핵을 주장하다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예상치 못한 카운터 펀치를 맞고 한덩치가 쓰러졌을 때, 고열로 신음하며 병원에 누워 있는
그를 둘러 엎고 뛰쳐나와 야외 천막응급실을 마련하고 찬바람을 쐬어줌으로써
다 죽어가던 그를 되살려 놓은 주인공도 닥터 박이었다.

2_ 한덩치 선수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몸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의식은 맑고 또렷했다. 쓰러지고 며칠 동안은 인사불성이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린 한덩치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있었다. 약간씩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사실 디독스 게임도 모두 체육관을 위해 한 일이었다. 한평생 체육관을 위해 몸 바쳐온 그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나서 체육관 이름을 바꾸고 그의 재활을 맡겠다고 나서는 꼴이 마뜩찮았다. 특히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한덩치는 의료진들이 내놓은 ‘실세 용퇴론’과 ‘물갈이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실세 용퇴론’은 점잖은 이름과 달리 ‘사지 절단술’이고 ‘물갈이’라고 불리는 수술법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뇌교체술’이 아니던가.

다만 서로 물고 뜯자니 피차 일반이라 민구스러워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는데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고 보자보자하니 가관이었다.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살고 싶었다. 살고 보자. 오직 그 생각 뿐이었기에 눈물을 삼켰다. 회복만 되면 작신 두들겨줄 사람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그는 이미 의료진 중에 누가 수술 대가로 검은 돈을 받은 전력이 있는지, 누가 빨간 혈관도 못 찾는 ‘적록색약’ 의사인지 알고 있었다. 이런 자들에게 몸을 맡기다니! 생각할수록 부아가 끓었지만 당장 몸이 움직여주질 않으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저들에게 몸을 맡겼다가는 이식한 장기와 그의 뇌신경 신호체계가 엉키면서 몸 이곳저곳에서 ‘합선’될 가능성이 컸다. 당장 손발이 안 맞고 스텝이 엉키는 부작용이 생길 게 불 보듯 뻔했다. 의료진은 우선 그의 배에서 지방과 복수를 빼내 체중을 줄일 것이다. 오랫동안 단련한 팔꿈치의 굳은살을 벗겨내고 허벅지의 근육을 녹여낼 것이다.

체질개선을 이유로 그동안 무료로 삼겹살을 대준 정육점과의 관계도 끊을 터였다. 뒤이어 뼈를 깎는 아픔의 성형과 주름제거, 모발이식 같은 미용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뇌는 한덩치인데 장기는 물론 손발마저 최첨단 신소재로 대체한 사이보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한덩치는 그만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간혹 슬럼프에 빠지거나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무적이었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지난 세월을 되새겼다. 체육관의 대표선수로 뛰어온지 어언 몇년이던가! 체육관을 위기에서 건져낸게 벌써 몇번이던가!

승부를 위해 뒷돈이 오가는 것은 우리 체육관의 오랜 관행이었다. 2004년, 돈이 든 차를 넘기다 들통나 감독이 옷을 벗고 체육관이 풍비박산이 났을 때도 그는 멀쩡하게 다시 살아났다.

그 때, 그를 구해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실제로 누군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덩치는 눈을 떴다. 저 얼굴… 아, 그래 닥터 박이다. 반가움 때문인지 불현듯 형광등 100개가 만들어내는 듯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 무렵에도 한덩치는 위기에 처한 체육관을 구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돈거래의 혐의을 덮으려고 엄한 연맹회장 탄핵을 주장하다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예상치 못한 카운터 펀치를 맞고 한덩치가 쓰러졌을 때, 고열로 신음하며 병원에 누워 있는 그를 둘러 엎고 뛰쳐나와 야외 천막응급실을 마련하고 찬바람을 쐬어줌으로써 다 죽어가던 그를 되살려 놓은 주인공도 닥터 박이었다.

한덩치가 부상을 당할 때마다 닥터 박은 안수목사의 손처럼 바빴다. 미소만 지어도 표가 생기고 손만 잡아도 판세를 뒤엎는다던 ‘신비의 약손’이 아니던가!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덩치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과 임상사례 중 유명한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을 좁쌀로 생각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닭들이 자신을 쪼아 먹을까 무서워 몇 년 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그 남자는 정신과 의사를 찾았다. 오랜 치료과정 끝에 자신은 좁쌀이 아니며 닭들을 무서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드디어 남자는 퇴원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의사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금세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압니다. 알아요. 제가 좁쌀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하지만 정작 저 닭들은 제가 좁쌀이 아니라는 걸 알까요?”

한덩치는 덩치에 비해 머리 회전이 빠른 축이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떠오른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닥터 박이 그의 사지가 아니라 뇌를 교체해 버린다면 그가 깨어났을 때 그가 자신이란 걸 어떻게 알까? 한덩치는 갑자기 자기정체성 혼란이 빚어낼지도 모를 철학적 고민에 휩싸였다.

의료진이 내놓은 ‘안락사’ 수준의 처방에 패닉상태에 빠졌던 터라 한덩치는 작은 충격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증세를 보였다. 게다가 닥터 박도 그런 수술법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자 마음 속에 일었던 반가움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고 닥터 박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3_ 닥터 박은 한덩치 곁에서 밤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한덩치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간혹 눈을 뜨는 듯했지만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선수재활의 신기원을 이뤄왔다 자부했던 닥터 박이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전면적인 성형은 물론이고 내과적, 외과적 봉합술로도 한덩치 선수를 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닥터 박은 문득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떤 기시감과 함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죽은 자의 뼈를 이어 붙여 2m44cm의 괴물을 만들어 낸 프랑켄슈타인. 닥터 박은 생명체를 만들려던 한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원한과 복수로 점철된 비극적 결말을 기억해 내고 잠시 몸서리를 쳤다.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듯 자신도 또 하나의 이상한 괴물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낯선 괴물이 깨어나자마자 닥터 박 자신에게 제일 먼저 달려드는 건 아닐까?

하지만 어차피 건너야할 강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애초에 한번은 버렸던 카드였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운명을 함께 해야할 생명이었다. 닥터 박은 애써 한덩치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지 그려보았다.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은 분명했다. 이왕이면 왼손에는 헌법을, 오른손에는 횃불을 든 자유의 여신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미소도 지었다.

그러는 사이 병실 창 밖으로 용띠의 해가 밝았다. 닥터 박은 용띠였다. 용띠 해에 용처럼 웅비할 수 있을까? 그런 감상에도 젖어보면서, 이 새로운 생명체가 체육관을 지켜줄 것인지 복수를 감행할 것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로 닥터 박은 침을 흘리며 잠자고 있는 한덩치 선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그랬듯 닥터 박도 아직 이 새로운 생명체에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이종격투기 챔피언 한덩치 선수가 쓰러졌을 때 닥터 박은 숨이 턱 막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것도 너무 빨리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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