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신문자료 3년간 분석
200쪽 분량 양민학살 자료 발표

“이렇게 늦게 찾아뵙게 되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의 원통한 한을 제가 기필코 풀어드리겠습니다…” 지난 12일 청원군 낭성면 도장골 골짜기의 흙무덤 앞에 잔을 올린 신경득교수(58·경상대교수)는 북바치는 감정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오열했다. 어쩌면 이승에서 처음으로 아버님에게 술잔을 올리는 자리일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52년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어머니와 4형제만을 남겨둔채 청주형무소에서 실종된 아버지. 그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나선 신교수의 눈물은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하의 강물이기도 했다.
“49년도에 아버님은 좌익활동이 문제가 돼 징역 1년형을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고 한다. 출소를 불과 며칠 남기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청주에 사는 친척이 걱정스러워 형무소 면회를 갖는데 그때 트럭에 실려서 어디로 떠나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그날을 아버님의 기일로 잡고 여지껏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신교수는 낭성면 도장골에서 청주형무소 사상범들이 집단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보 94년 6월호 보도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방학살이 아닌 기결수 처형으로 보고 있다.

청주형무소서 끌려간 아버지

94년 취재당시 생존했던 인근 마을의 현장 목격자에 따르면 도장골에서 숨진 100여구의 사체는 죄수복을 입고 2명씩 수갑을 찼으며 등뒤에서 총을 맞아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평상복을 입고 수갑을 차지않은 상태로 처형된 보도연맹원의 학살현장과는 사뭇 다른 증언이었다. 나이 28세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은가락지 장수를 하며 행여 남편의 소식을 들을까, 이곳저곳의 6·25 학살현장을 찾아다녔다. 어머니의 힘겨운 품에서 자라던 막내동생은 일찍 세상을 떴고 신교수 또한 영양실조로 인한 야맹증으로 고생하다가 최근에는 급격하게 시력이 떨어지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괴산군 증평읍 덕상리가 고향인 신교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입학조차 불가능한 처지였다. “다행히 청안중학교 교장선생님이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3년간 학비를 면제해 주는 바람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도 장학금 조건을 찾아 청주상고에 입학했는데, 한 학기밖에 지원해주지 않아 학비마련하느라 무진 고생을 했다. 대학도 4년 장학혜택을 주는 청주대 국문과에 수석입학하게 됐다. 너무 고생스럽게 공부하다보니 남들처럼 든든한 아버지가 안계신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연좌제 가위눌린 남은 가족들

대학졸업후 청주상고 교사로 10년간 재직했던 신교수는 석사·박사과정을 거쳐 대학 시간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내 지난 84년 진주 경상대 교수로 임용돼 입지전적인 ‘성공시대’의 주인공이 됐다. 신교수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에 대한 연구에 나선 것은 지난 97년. 당시 ‘한국 전후 소설 연구’라는 논문제목으로 남북한 전쟁문학을 연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조선인민보’ 영인본을 입수해 조선 종군작가의 글을 접한 결과 남한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됐던 것. “한국전쟁의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적인 기록을 접한 순간,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동신문’ ‘민주조선’등 당시 북한 신문자료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출력해 3년여동안 자료정리를 하게 됐다. 200페이지 분량의 원고가 작년 4월에 마무리됐다. 월간 <말>지에 7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신교수의 원고는 한국전쟁의 감춰진 진실을 또하나 건져내는 개가였고 국회전문위원, 교수, 변호사, 기자등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이메일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국문학을 전공한 신교수가 한국전쟁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본격연구에 착수한 것이 다소 생경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교수가 지난 94년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를 발족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던 이력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수긍할 일이다. “친일화가로 손꼽히는 운보 김기창씨가 분에 넘치게 초정리 일대에 대규모 미술관을 짓는다고 하길래, 뜻있는 지역 분들과 의기투합해 반대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정진동·김창규·지용주·정연승·이관복 같은 분들이 참여해 초기회원이 50여명에 달했다. 단재동상 설립운동과 지난해 충북지역 민간인학살대책위원회 구성도 역실협에서 주도했다”

양민학살사 완결판 6월 발간예정

신교수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타고난 민족적 역사의식 이외에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한국사의 중심에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아버지, 그를 위한 망부가일 지도 모른다. “아버님이 떠나신지 52년이 됐는데, 자식으로써 너무 무심했다는 자책도 있다. 하지만 과거 군사독재정권에서 연좌제의 덫에 걸리지않고 고교교사, 국립대 교수로 임용된 것은 기적같은 요행이었다. 이제 한국전쟁과 관련된 양민학살의 모든 자료를 집대성한 완결판을 만들고 싶다. 영동 노근리 미군양민학살과 전국 각 형무소에서 자행된 예방학살, 전국 수십만명으로 추산되는 보도연맹원 학살등 비무장 양민들에게 가해진 전쟁범죄를 낱낱이 밝혀 고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전쟁방지의 교범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
신교수는 낭성면 도장골에서 기자와 함께 내려오면서 ‘백조일손 지묘(百祖一孫 之墓)’라는 말을 되뇌였다. ‘조상은 백명이지만 후손은 하나’라는 의미로, 전쟁 학살후 무더기로 매장처리된 현장에 대해 모든 희생자를 ‘조상님’으로 여기고 명복을 빈다는 뜻이었다.
/ 권혁상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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