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홍 전 충북과학대학장

고위 공직자들이 임기를 마칠 때마다 꼭 사용하는 말이 하나 있다. “대과(大過)없이 직분을 마치게 되어 감사하다”는 식의 일종의 관용어다. 만약 정년 퇴직의 경우 이 말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말 그대로 30~40년 간의 공직을 무사히 마쳤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개인에겐 큰 영예다. 한 때 잘 나가던 고위 공직자들이 각종 추문에 연루돼 인생 말년을 구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요즘엔 특히 그렇다.
충북 공직사회에서 ‘풍운아’로 통하던 김광홍씨(65)가 지난 8일 도립 충북과학대 학장을 정년 퇴임함으로써 39년의 공직을 마감했다. 일단 행정의 공조직에서 임기를 마친 후 4년이나 더 도립대학장으로 공직신분을 누린 그는 그야말로 여한없는 역정을 걸었다. 그동안 숱하게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한번의 대과도 없었기에 그의 퇴임식장은 많은 공직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공직생활의 야사, 기록으로 남겼으면

많은 얘기를 기대하고 그를 만났지만 “나를 절대 미화하지 말라”며 극구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막상 인터뷰는 싱겁게 끝났다. 공직 재임중 주로 의전과 관리부서의 책임자로 일했던 그는 사석에선 종종 기록되지 않은 뒷얘기, 소위 ‘야사(野史)’로써 듣는 이의 혼을 쏙 빼기도 하지만 역시 “당사자들에게 누가 된다”는 지나친 배려(?) 때문에 불발됐다. 이들 야사중엔 역대 도지사 및 대통령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말에 일말의 기대를 가져 본다.
퇴임사에서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용, 이런 말을 후배들에게 남겼다. “우주에서 끝까지 살아 남는 종(種)은 가장 강한 종도 아니오 가장 우수한 종도 아니고 오직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며 변모하는 종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을 것이다.

준비된 공무원, 고비 때마다 발탁

1963년 충북도 공무원 교육원 교수직으로 공직에 몸담은 그는 교육원 교수부장, 청주시 부시장, 제천군수, 도 식산국장, 괴산군수, 도 내무국장, 증평출장소장, 제천시장, 충주시장, 도 기획관리실장, 정무부지사 등을 역임한 후 1998년 3월 충북과학대 학장에 취임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들 직책중에 증평출장소장과 정무부지사, 그리고 충북과학대 학장은 초대다. 공직자가 처음 신설되는 직책에 임용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다분히 모험,실험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우선 당사자의 자질과 능력이 검증돼야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적 수완’ 이 요구된다.
실제로 이들 자리가 신설될 때마다 책임자 선정을 놓고 상당한 논란을 빚었으나 번번이 그가 최종 낙점됨으로써 비판도 받았다. 그의 공직 수행이 너무 정치적이라는 곱지 않은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 본다면 그가 퇴임사에서 남긴 ‘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굳이 남들과의 차이를 논한다면 미리 준비하고 노력한 죄(?) 밖에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소문과는 달리 누구보다도 돈·재산문제에 깨끗했다.
충북과학대 초대학장으로 임용될 때도 공직 수행중 시간을 쪼개며 고생해서 얻은 행정학석사와 명예정치학박사 학위가 결정적 호재로 작용했다. 어쨌든 이들 직책의 ‘초대’를 맡으며 역시 대과없는 임기를 마침으로써 자신이 할 말을 역할로써 보여준 것이다.

관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

김 전학장은 도내 공무원 사회에서 관운이 억수로 좋은 인물로도 비쳐졌다. 그 많은 요직을 꿰차면서 임기를 무사히 마치기까지는 본인의 능력도 중요했겠지만 각종 여건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충주시장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여름 집중호우로 시내에 인접한 남산에 큰 산사태가 발생했다. 고대 산성의 유물이 남아 있는 이산은 충주 시민들이 수시로 찾는 명소로, 당시 충주시는 이곳에 임도를 개설하면서 시민단체와 마찰을 빚던 터였다. 산사태가 한 마을을 덮쳤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에 나갔던 기자(그때 충주 주재였다)는 그만 놀라움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엔 전혀 예기치 않던 지역에 엄청난 산사태를 일으킨 자연현상의 위력에 놀랐고 다음엔 그럼에도 불구, 인명피해가 없다는 점에 또 한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 사면에 조성되어 있던 과수원 전체가 사라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토사와 바윗돌이 마을로 쏟아졌지만 중간중간의 장애물에 부딪히면서 피해를 극소화한 과정이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만약 이 산사태가 그대로 마을을 덮쳤다면 쑥대밭이 될 수 밖에 없는 지형적 조건이었던 것이다.
당시 산사태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충주시가 조성한 임도가 원흉임을 확신한(시는 이를 부인했다) 기자는 김 전학장의 관운을 재삼 머리에 떠올렸다. 이 때는 재난재해 한방에 시장,군수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관선시대였다. 그래서인지 요즘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명예로운 공직생활을 가능케 한 후원자”라는 덕담을 빼놓지 않는다. 전장에서 살아 남은 노병(老兵)의 자기성찰인 셈이다.

농민과 막걸리 기울일 때가 가장 보람

그에게 공직생활중 가장 보람있었던 일을 물었다. “시장,군수를 수행하면서 농사철에 농민들과 술 담배를 같이 하며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눴을 때다. 작은 것에서 얻은 감동들이 나에겐 더 절실하게 다가 왔다.” 이젠 심적 부담을 털어버리고 그동안 못만난 사람들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는 그는 학계 등 주변 여러 곳으로부터 영입제의를 받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분명한 것은 그에게 ‘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은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이고, 때문에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 한덕현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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