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가 첫발 내디딘 스물한 살 박명원 씨

20여년간 뿌리내려 온 시민운동은 이제 우리 사회의 한 축으로 성장해 정권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민주화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시민운동, 그 중심에는 20대가 있었다.

대학 총학생회는 시민운동가를 배출하는 요람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변하고 대학이 변했다. 학생들도 달라졌다. 그들의 머릿속은 온통 취업에 대한 걱정뿐이다. 88만원 세대로 몰고 가는 사회가 한창 뜨거워져야할 청년들의 가슴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오랜만에 등장한 스물한 살 풋풋한 시민운동가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운천동에 위치한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실, 3개월간의 인턴생활을 마치고 정식으로 참여연대의 일원이 된 박명원 간사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흥분이 교차했다. “NGO는 꼭 필요한 존재다. 무대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세상에 어떤 일이 생겨나든 그 자리에 항상 있는 존재다. 약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부조리나 악법때문에 슬퍼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다.” 시민운동가로서 첫발을 디딘 박명원 간사의 눈빛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0학번인 박 간사는 대학을 휴학하고 참여연대에 몸담고 있다. 중학생 시절 ‘인간극장’이라는 다큐멘터리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졌다는 박 간사는 고등학교 진학 후 은사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할 지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다. 국가보조금으로 생활하는 학생이 학교를 다니며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이야기가 방송됐다. 당시에는 국가보조금이 뭔지도 몰랐다. 그걸 보고 사회복지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조금 공부를 해보니 그 친구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때가 복지문제와 노동문제에 대한 첫 고민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박 간사는 고등학교 진학 후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결정했다.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지낸 남성수 선생님에게 윤리수업을 받았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을 때 박 간사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고등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대학 새내기 시절 행동하는복지연합 대학생모임에 참여하며 시민단체와 인연을 맺은 그는 사회복지학의 연장선에서 경험삼아 참여연대를 찾았다. “인턴으로 일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 작은 일이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박 간사는 말했다.

박 간사는 또래들의 사회 참여에 대해서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2004년 중단된 참여연대 대학생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시민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 주제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학문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냥 네가 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세상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간사가 진로에 대해 확고한 결심을 한데는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큰돈은 못 벌어도 세끼 밥은 먹을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자기가 한 일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하셨다. 부모님은 응원해주시는데 오히려 친구들이 만류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박 간사는 “참여연대는 특정 주제가 아닌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 전반에 걸쳐 활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머지않아 군대를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공백은 있겠지만 평생 시민운동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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