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희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국장

언론이 보여주는 현실은 ‘재구성’된 현실이다. 그것이 진실이냐, 왜곡이냐를 말하기에 앞서 언론이 정해 준 틀 즉 프레임이 작용한다. 그런데 이 현실이라는 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듯 착각하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역언론은 이 부분에서 더욱 한계를 보여준다.

무슨 이야기인가. 우리 지역에 신문이 꽤 많다. 경제규모나 인구수를 놓고 봐도 지나칠 정도로 많다. 문제는 수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생각할 때 매체 수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그렇고 그런 신문들이 너무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지역신문들이 보여주는 아이템에 그 어떤 차별성도 찾기가 힘들다. 간혹 눈에 띄는 몇 개의 기사를 빼면 거의 같은 내용이다. 어떻게 똑같이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해법마저 같을 수가 있는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정답은 출입처에 있다. 지역신문사에 취재 기자가 그리 많지 않다. 열악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적화된 시스템이 바로 출입처제도다. 최소 인원으로 모든 영역을 다룰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몇몇 안 돼는 기자들이 출입처 곳곳에서 기사를 생산해내고 있다. 취재 기자 몇 명이 전 분야를 맡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터. 그러니 취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도 신문은 만들어야 하니 기자들도 고달플 것이다. 이러다보니 한심한 경우도 때때로 발생한다. 보도자료 베끼기, 통신기사 베끼기, 전국지 베끼기 말이다. 관행이라 하겠지만 이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보도자료와 통신기사에 기자들이 의존하고, 출입처 기자실을 벗어나지 않는 한 뭐 새로운 걸 기대하기가 참 어렵게 돼버렸다. 지난해 말 <충청리뷰>가 보도했던 운천동 피난민촌 보고서에 열광했던 독자들을 떠올려보자. 왜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를 인상적이었다 말했을까. 새로웠기 때문이다. 다른 신문에서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출입처를 두지 않고 현장을 취재하는 신문들이 없는 게 아니다. 주간신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말은 접어두시라.

신문의 기본 역할 즉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출입처 제도도, 보도자료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하는 신문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신문이 있어 문제인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지역신문에 독자들이, 지역주민들이 관심없어 한다는 사실이다. 신문이 변화를 거부하고 편하려 들수록 독자들은 멀리 떠나갔다.

종이 신문의 위기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만 원인이 있는 게 아니다.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말하길 신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양질의 저널리즘이 필요하다고 한다. 핵심은 좋은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순한 정보, 어느 신문이나 할 것 없이 똑같은 내용으로는 승산이 없다. 좋은 콘텐츠는 독자들로부터 절대 외면 받지 않는다. 외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서 뉴스는 확산된다. 독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출입처부터 벗어날 것을 권한다. 폐쇄적인 기자실을 박차고 나오시라.
여전히 사람들은 뉴스를 원하고, 본다. 어떤 뉴스를 만들어낼 것인가. 이제 언론이 보여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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