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남북문제’, ‘통일’, ‘이산가족’ 등의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우리의 분단된 현실이 만들어낸 노래였다. 우리는 언제까지 <그리운 금강산>을 불러야 할까?

지난 3월의 천안함 사태에 이어 지난 달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남북간의 긴장이 전에 없이 고조되고 있다. 금강산 관광도 중단된 지 2년 반이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듣는 <그리운 금강산>이 예전 같지 않다. ‘왜 또다시 그리운 금강산이 되었단 말인가?’ 하는 절규처럼 들리는 것이다.

2년 전 필자가 이 노래의 작곡자인 최영섭(1929~ ) 선생을 만났을 때 선생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조국이 분단된 노래를 작곡했더니, 그 노래로 인기를 얻어 유명한 작곡가가 됐습니다. 차라리 <그리운 금강산> 같은 곡은 없었던 게 좋았습니다. 먼 훗날 통일이 됐을 때, ‘과거 분단시절 남한에서 금강산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그리운 금강산>이란 노래가 있었어’라고 회상하면서, 이 노래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만큼 통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노(老) 작곡가의 진심어린 말씀이었다.

▲ 한상억 시인최영섭 작곡가
그리운 금강산
한상억 작시 최영섭 작곡

누구의 주제(주재)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예대로인가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슬픔 풀릴 때까지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 금강산 비봉폭포
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작곡되었다. 작곡가의 악보 초고에 1961년 8월 18일로 기록되어있다.
많은 가곡 관련 자료에 그리운 금강산은 6.25 동란 11주년 혹은 12주년 기념연주회에 쓰기 위해 문공부의 위촉으로 작곡됐다거나 8.15 광복절 기념 연주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그리운 금강산>이 만들어진 동기는 이러하다.

1961년은 KBS가 남산에 있던 시절이다. ‘이 주일의 노래’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잘 알려진 가곡들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과 강에 대한 노래를 새로 만들어 발표하고 보급하던 프로였다. (KBS는 이때까지 라디오뿐이었다. TV를 시작한 것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인 1961년 말부터이다.)

가사를 새로 만들고 곡을 붙이는 일은 시인인 한상억(1915-1992) 선생과 작곡가 최영섭 선생이 맡아 했다. KBS는 두 분에게 남북한은 물론이고 멀리 중국과 러시아 등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도 들려줄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감동적인 노래를 만들어 줄 것을 주문했다.

그 결과로 <한강의 노래>, <낙동강 칠백리>, <백두산은 솟아있다> 등의 새 노래가 나왔고 제법 인기를 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영섭 선생이 KBS 국제방송 음악계장을 맡고 있던 동요 작곡가 한용희선생과 방송국 근처 ‘산길’ 다방에서 차를 한 잔 마시게 되었다. 이날 한용희 선생이 최영섭 선생에게 “요즘 만든 노래들이 다 좋은데, 금강산에 대한 노래가 없어 아쉽다.”고 했다.

최영섭 선생은 이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한상억 선생을 만나 ‘금강산에 대한 노래가 없다’는 한용희 선생의 말을 전했다. 한상억 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금강산에 관한 시를 써 놨다”면서 그 자리에서 <그리운 금강산>이란 시를 최영섭 선생에게 보여주었다. 그 시는 하루 이틀 전에 쓴 게 아니라 적어도 반년 전에 쓴 시로 보였다. 최 선생은 가사가 너무 애절하고 좋아서, 그날 밤에 곧장 작곡을 했다.

그렇게 <그리운 금강산>을 완성한 후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녹음을 했다. 지휘자는 최영섭 선생과 서울음대 동기 동창인 이남수씨였다. 그동안 최영섭 선생의 곡을 녹음하면서 곡에 대한 평을 한 마디도 안 했었는데, 이날 ‘그리운 금강산’을 녹음하고 나서는 최 선생을 찾더니 “어떻게 이런 곡을 다 작곡할 수 있었느냐”며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 그 후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작품 쓰셨어요”란 인사를 많이 받았다. 다른 곡을 작곡했을 때는 못 들어봤던 찬사였다. 최 선생은 2년 전 필자에게, “지금 생각해보면, 작곡 실력이 늘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가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했을 뿐인데 그런 곡이 만들어졌습니다. 가사와 곡이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누구의 주제(主題)런가’는 원래 ‘누구의 주재(主宰)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악보가 책으로 엮어져 나왔을 때 보니 가사 첫머리의 ‘누구의 주재런가’가 ‘누구의 주제런가’로 잘못 인쇄되어 있었다.

▲ 우리 가곡의 날 음악회 후 최영섭 선생과 ‘아리수사랑’ 카페 회원들(2010.11.11)
발음은 비슷한데 영어로 subject 를 의미하는 ‘주제’가 아니라, ‘주장하여 맡는다’, 즉 ‘회의를 주재한다’라고 할 때 쓰는 그 ‘주재’가 원래 가사의 단어였다. 최 선생은 당초 한상억 선생이 쓴 시속의 ‘주재’는 영어로 크리에이션(creation) 즉 ‘창조’란 의미라고 설명했다. 즉 “누가 주재해서 만든 산인가 이 맑고 고운 금강산이” 이란 뜻이었다.

작사자 한상억 시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찬송가 중에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인자가 되신 하나님...’이렇게 시작하는 <만유의 주재>란 찬송이 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인데, 누구의 주재란 바로 이 찬송에서처럼 ‘하나님이 주재하신 금강산’이란 뜻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가사가 잘못 인쇄되어 나온 사실을 알게 된 한상억 선생이 ‘물길을 돌리지 말자’고 했다. 최 선생은 “제가 생각해도 30% 정도는 뜻이 전달된 것 같아서 묻어 두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남북 화해 무드 조성되면서 가사 여러 군데 손질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이해 처음으로 남북적십자 회담이 시작되면서, 한 선생이 가사를 일부 손질했다. “분위기가 바뀌었으니 가사를 바꾸는 게 좋겠다”며 직접 바꿨다. “외압이 있었느냐?”고 최 선생께 물어봤는데, “외압은 없었다”고 했다.

주재가 주제가 된 것은 출판사의 실수였지만, 작사자가 직접 바꾼 곳은 세 군데이다.
1절을 보면, 후렴에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지 몇몇 해’인데, 원래는 ‘더럽힌 지 몇몇 해’였다.
2절 가사 중에,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는, ‘예대로 있나’로,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는 ‘맺힌 슬픔 풀릴 때까지’로 고쳤다.

아무튼 1972년 이후부터 남북화해분위기, 실향민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전 국민의 통일에의 염원 등으로 그리운 금강산은 점차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고 금강산 관광길까지 열리면서 최고의 인기가곡이 되기에 이르렀다. 통일 주제가이자 국민 가곡이 된 것이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처음 시작됐을 때 최영섭 선생은 최초의 관광단에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북한 측에서 ‘애국가’와 ‘그리운 금강산’을 북한 땅에서는 부르지 못 하도록 해달라고 우리 측에 요청을 해왔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에 부담이 있어서였다. 그 2년 후인 2000년에 처음으로 금강산에 발을 디뎠다. “한상억 선생과 함께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고 하셨다. 한상억 선생은 미국에서 1992년 작고했다.

필자가 최영섭 선생을 최근에 만난 것은 지난 11월 11일 ‘우리 가곡의 날 기념 음악회’가 열린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였다. 우리 가곡의 날은 올해로 6회째를 맞았는데, 이 날을 제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이 최영섭 선생이다. 팔순이 넘은 나이신데도 여전히 정정하셨다. 이날도 무대에 올라 청중들에게 가곡에 대한 사랑을 당부하셨다. 한국가곡의 중흥을 위해 여전히 동분서주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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