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노래> ③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내세를 믿느냐? 한 10년 전에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물어 본 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질문한 <내세>의 유무는 우리의 사랑이 극도의 절망적인 운명에 부닥쳤을때, 죽음을 가정한 사랑에 대한 깊이를 다짐하는 말이었다. 내세가 있다면 죽음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청산하고 싶다는 것을 암시한 질문이다.
총명하고 영리한 그 여인은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있고 말고요. 만일 내세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처럼 괴로운 운명을 스스로 불러오는 사랑에 우리가 모든 것을 바칠 리가 있겠어요?”
참으로 영리한 대답이라 생각했다.

내세가 있기 때문에, 삶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더욱 성실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내 마음속을 환하게 꿰뚫어 보고 하는 대답 같았다. ‘그녀의 창백한 이마, 얇은 입술이 지금은 무엇을 생각하며 얘기하고 있을까. 먼 사람아.’ ”

박목월 자전집 <밤에 쓴 인생론>, 박목월, 삼중당, 1984. <밤에 쓴 인생론>은 1973년 판도 있으나 여기에는 이와같은 일기 부분은 들어있지 않다.

책에는 일기 앞에 단지 12월 10일 일요일이라고 날짜와 요일만 적혀있다. 12월 4일의 일기에 “서울발 열차로 아내와 함께 인천에 내려갔다. 결혼(1938년) 후 25,6년간, 함께 여행을 한 것은 손을 꼽아 헤일 정도다.”라고 쓰여있는 것 등으로 볼 때 1960년대 초로 추측했는데 1960년대 초에 12월 10일이 일요일인 해를 찾아보니 1961년이었다. 여기서 10년 전이 정확하게 10년 전을 말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목월의 글에서의 10년, 20년, 30년은 세상의 셈법과 같지 않다.

▲ 고향 경주 모량리를 찾은 목월 내외.
해후(邂逅), 그리고 하직(下直)
목월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그 여인을 만났다. 어느 겨울날 그녀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녀는 결혼을 했고 어린 아들도 있었다. 목월은, “30년 가까운 세월의 저편 끝에서 찾아오는 한 사람의 나그네 같은 심정이었다”고 ‘종말의 의미’란 그의 글에서 그 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고 있다.

“내가 그녀를 방문한 것은 눈발이 내리는 날이었다. 백발이 되면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나보고 이승을 하직하려니 하고 젊은 날에 마음 속으로 다짐하던 그녀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물론 내가 벼르던 만큼 백발이 된 것은 아니다.

문이 열렸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막혔던 하나의 통로(通路)가 이제 열리는 것이다.
미소를 띤 그녀의 모습, 문득 나는 외면해 버렸다. 외면해 버렸다기보다 고개가 절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왜 외면해 버렸을까! 나도 모를 일이다. 유리창에는 여전히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렇다. 나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미소를 띤 채 서로가 건너다 보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세웠으며 또한 얼마나 나 자신을 채찍질해야 했던가. 하지만 그것은 지난 일이다. 지금 그녀와 나는 서로 미소 띤 얼굴로 물끄러미 건너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어섰다. 이제 하직해야 할 때가 이르게 된 것이다.

▲ 목월이 살았던 모량리 옛집(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승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 보려던 젊은 날의 그 새롭고도 눈물겨운 결심을 이루게 된 오늘의 나의 발걸음은 무척 허전하고도 가벼웠다.”

이 글 가운데,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대화가 있다.
“아드님도 벌써 많이 자랐겠지요?”
“녜, 벌써 대학에서 선생 노릇을 하는걸요.”
“그렇게 컸어요, 며느님을 보셨어요?”
“녜, 아직 장가는 들이지 않았습니다. 곧 장가를 보내야겠읍니다. 댁의 아드님은?”
“아직 어린걸요.”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교회 일만 돌보십니까?”
“아녜요, 아버님도 이제 많이 늙으셨는걸요.”
이 대목을 보니 제주에서 헤어진 그녀가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가 목사였고, 제주에서 그녀는 매주일 교회에 열심히 나갔다는 기록 등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목월은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후 고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 63세였다. 목월은 ‘이승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 보려던 젊은 날의 그 결심’을 이룬 이 극적인 해후의 뒤에 <방문(訪問)>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방문했다.
이제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그는
집에 있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
그는
나를 영접했다.
손을 맞아 들이는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도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應答).

차가 나왔다.
손님으로서 조용히 드는 잔
담담하고 향기로운 것이
팔푼쯤 잔에 차 있다.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하직했다.
하직 맙시다.
이것은 동양적인 하직의 인사.

출처 : 박목월 평전·시선집 <자하산 청노루>, 이형기 편저, 문학세계사, 1986 / <박목월시전집> 이남호 엮음, 민음사, 2003

▲ 목월이 살던 서울 원효로의 집.
이 시는 1962년 3월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30년 가까운 세월’이라니? 목월은 그녀와 헤어진 후 10년이 채 안되어 다시 만난 것이다. 박목월 식(式) 셈법으로 30년이다. 세상의 시간과는 다른, 시인의 감성속 30년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단 한번의 시련
앞서 말한대로 목월 부인 유익순 여사의 제주 방문이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목월과 H양과의 문제에 당면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당시 자신의 심경을 밝힌 글이 남아있다.

<밤에 쓴 인생론>에 들어있는데, 왜 부인의 글을 여기에 실어 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부의 대화’라는 장(章)에 그 글이 실려있음으로 편집자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밤에 쓴 인생론>에서 부인의 글은 6쪽에 걸쳐있는데 모두 이 사건에 대해 쓴 것은 아니다. 시인의 아내로서 겪어온 생활고와 돈에 무관심한 남편의 태도, 그러나 남편에 대해 갖고 있는 깊은 신뢰 등을 담담히 적고 있다. 그러면서 이 글 중간에 ‘단 한번의 시련’이라는 소제목 아래 남편과 H양과의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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