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로 파괴된 도심과 달리 문화유적 산재
서원경성·읍성·나성 등과 연관성 규명 숙제

청주시가 충북과학교육연구원(상당공원 인근)에서 용담·명암·산성동사무소를 연결하는 새 도로를 내기 위해 우암산 토성(土城)을 절개하는 개착공법으로 공사를 발주함에 따라 공법을 바꾸거나 공사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본보 646호·10월1일자>

우암산은 무심천과 함께 청주를 상징하는 자연경관임과 동시에 대표적인 여가생활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우암산이 지닌 역사적 가치에 대한 접근과 조명은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주는 이미 백제와 신라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경(西原京)이 설치됐을 정도로 유서 깊은 천년고도다. 그러나 도심 유적은 끊임없이 이어진 개발로 인해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우암산 역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원형은 훼손됐지만 그래도 개발이 거듭된 도심에 비해서는 역사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 우암산의 유적은 크게 성곽유적과 불교유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자연지형을 이용해 흙으로 쌓은 산성과 나성(羅城)은 도심의 읍성과 이어졌기 때문에 우암산은 고대로부터 청주사람들의 생활공간이었으며 전시에는 난리를 피하는 장소였다.
7일 아침 노병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과 함께 우암산에 올라 토성의 성곽을 따라 걸으며 흩어져 뒹구는 역사의 편린들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등산은 삼일공원에서부터 시작됐다. 안개가 남아 스멀거리는 산길은 깊은 산중에라도 든 것처럼 신비감을 자아냈다. 노병식 조사연구실장은 탐침봉으로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토성이지만 경사가 급한 곳에는 형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횡으로 돌을 쌓아(사진1) 계단처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국궁장을 따라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로로 놓인 성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 실장은 “올 때마다 다른 게 보인다. 그냥 등산로처럼 보이겠지만 깎아낼 곳은 깎아내고 쌓을 곳은 흙을 다져가면서 쌓아 인위적으로 성벽을 만든 것이다. 토성이지만 구간에 따라서는 기와나 돌을 밀어 넣어(사진2) 성을 쌓았다. 또 토성의 내벽 윗부분(사진3)에는 돌을 쌓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물론 한꺼번에 이 거대한 산성이 완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자연지형을 이용해 천혜의 요새를 만들고자 했던 첫 번째 사람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661~681) 대에 서원술성(西原述城)의 축조와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김유신의 맏아들 삼광(三光)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열기(裂起)가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의 태수(太守)가 됐고 그와 함께 김유신을 보좌하던 친구 구근(仇近)은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것.

또 ‘신라 신문왕(681~692) 5년인 685년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원태(元泰)를 통치책임자인 사신(仕臣)으로 삼았다는 것과 신문왕 9년인 서기 689년 윤 9월26일에 신문왕이 장산성(獐山城)에 행차하고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태조 2년인 919년에 청주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태조 13년인 931년에는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노 실장은 “청주읍성이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고 우암산성과 읍성을 연결했던 나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고려할 때 우암산성은 서원경성이나 고려의 청주성, 나성과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관련이 있다”고 힘줘 말했다.

“강돌이 왜 산에 올라와 있겠소?”

숨을 헐떡거리며 한 굽이를 돌자 돌무더기(사진4)가 나타났다. 노 실장은 “투석전용 돌무더기다. 충주 장미산성 등 고대 산성에는 대부분 이런 돌무더기가 있다. 던지는 돌 뿐만 아니라 굴리기 위한 바윗돌이 있는 곳도 있다. 여기 강(江)돌도 있는데 이 게 왜 산에 올라와 있겠냐”고 되물었다.


정상으로 가는 도중에 체육시설이 있는 평평한 부지(사진5)는 일부러 평탄작업을 한 것이 아니다. 북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는 기와조각들(사진6)이 나뒹굴고 있다. 노 실장은 “조선시대 양반들이라고 다 기와집에 산 게 아니다. 고위 관료의 집이나 관청, 사찰들에나 기와지붕을 얹었다. 우암산에서는 백제나 신라시대 기와부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대의 기와가 관찰된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어골문(사진7·魚骨紋·물고기 가시무늬) 기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후기까지 널리 관찰되는 것이다”라고 일러줬다.

KBS와 MBC송신탑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길옆에는 샘물이 있다. 샘물 부근에 평평한 1000여평의 대지는 흥천사(興泉寺)터다. 1980년 지표조사에서 ‘흥천’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을 발견함에 따라 절터의 이름을 찾게 된 것이다. 1970년 은덕사라는 절의 요사를 신축할 때 이미 청자와 동종, 쇠솥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샘물이 있고 습지에 자라는 고마리가 우거진 사이로 기단(사진8)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름에 샘 ‘천(泉)’자를 쓴 절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정상 올라갈수록 시대도 올라가”

샘물로 목을 축이고 정상도전이 시작됐다. 노 실장은 “위로 올라갈수록 유물의 시대도 올라간다”며 “이는 내성을 먼저 쌓고 외성을 쌓았으며 나중에는 나성을 쌓아 도시의 읍성과 연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상 부근에서 발견한 기와조각(사진9)은 지금까지 보던 것과 남달랐는데, 노 실장에 따르면 신라시대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것이다.


정상에 있는 체육공원 역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노 실장은 주춧돌로 보이는 돌들이 모여 있는 곳(사진10)을 가리키며 “건물터가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정상에서 용담동·대성동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유난히 기와조각(사진11)과 석재(사진12)가 많이 노출돼 있다. 노 실장은 “땅에 박혀있는 기와들은 지붕에 사용한 게 아니라 성벽을 만들 때 밀어 넣은 것들이다. 정상부근은 흙에 기와와 돌을 섞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우암산 등산로는 대부분 토성의 성곽 위를 걷는 것이다. 그러나 곳에 따라서는 토성의 성벽과 등산로가 어긋나있다. 노 실장은 “우암산성 안에 작은 토성들 즉 3,4개의 성곽들이 더 있다”며 가끔씩 풀숲으로 안내했다. 이른바 ‘자성(子城)’이다. 그러나 나 같은 비전문가의 눈에는 자성이 보일 리가 없다. 다만 개념은 이해가 됐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에는 언제든지 군인으로 전환할 수 있는 주민들이 성안에 살았다. 승려들도 그 부류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우암산성에는 스토리가 있다”

노 실장은 지형을 설명하며 작전시 협공(挾攻)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지점과 장대(사진 13·將臺·장수가 군사를 모아놓고 지휘하거나 훈련하는 곳)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 등을 짚어줬다. 협공지점은 산줄기가 활처럼 휘어나가는 곳이고 장대가 있었음직한 장소는 전망이 트여있는데다 석재가 다수 노출돼 있는 지점이다. 설명을 듣고 보니 병졸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노 실장은 “상당산성은 후대에 쌓은 석축이 남아있어 성곽유적이란 게 훤히 드러나지만 완벽한 산지성이라 스토리는 별로 없다. 이에 반해 우암산성은 나성으로 이어져 청주사람들의 생활공간 그 자체였기 때문에 무수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런 얘기들만 잘 엮어도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토리텔링’이 관광의 필수요소로 뜨는 시대에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우암산과 무심천 등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배치돼있지 않다.

청주문화원이 2001년 펴낸 향토사료집 ‘우암산 그 역사의 숨결’에 따르면 옛날이야기 수준의 설화를 비롯해 실존했던 인물과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그럴듯한 전설들이 9편이나 수록돼 있다.

그 가운데 ‘가좌골의 축성’편은 신라 혜공왕 6년(770년), 왕이 서원경을 순행할 계획을 세우고 보은 삼년산성을 거쳐 서원경성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의 가마가 머무른 큰 마을은 큰 가재(駕在)골, 작은 마을은 작은 가재골이 됐다가 훗날 가좌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가좌골 인근 광덕사 계곡의 이름은 ‘서울이 있었다’는 뜻의 재경(在京)골이니 우암산성에 서원경의 치소(治所)가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지도에도 없는 산성 이런 푸대접이”

산행은 3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노 실장은 “노출된 부분만 3km가 훨씬 넘는다. 외성에서 나성으로 이어져 지금은 도심개발로 사라진 부분까지 합치면 7km는 족히 될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처럼 노출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토성의 존재를 알리는 홍보물마저도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산 길에 “단 하나에 불과하다”는 안내판에 이르렀다. 개착공법으로 터널공사가 이뤄지는 지점과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노 실장은 탐침봉으로 안내판에서 산행이 시작됐던 삼일공원 부근(사진14)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외성이 시작됐는데 안내판에 다소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노 실장은 또 “이처럼 토성의 흔적이 분명한데 2만5000분의 1축척의 지도에도 우암산성이 표기되지 않았다. 이것이 행정의 현주소다”라고 꼬집었다.


청주향교 뒤편으로 가닥을 잡아 내려오자 개착공사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곳곳에 절개구간을 표시한 붉은 깃발(사진15)이 꽂혀있었고 벌목이 이뤄질 나무(사진16)에는 노끈이 묶여있었다. 개착공법은 말이 터널이지 완전히 산을 자른 뒤에 사람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지붕을 덮는 것이다. 이 같은 유형으로 공사가 이뤄진 곳으로는 우암산과 상당산성 등산로를 잇는 어린이회관 옆 동부우회도로 터널이 있다.

“굳이 터널 뚫으려면 굴착공법으로”

절개지점을 따라 산에서 내려오니 공사 시작지점인 수동 상좌골이다. 도로는 충북교육과학연구에서 확장되기 시작해 기존도로를 최대한 이용하다가 방송국 송신소를 향해 올라가는 산머리에서 갈라져 용담동 방향으로 틀어지는 것이다.

도로가 넓혀지는 지점에서는 주택철거공사가 한창이었다. 노 실장은 “가옥을 철거한 이곳도 성안이기 때문에 유적이 있든 없든 살펴봐야 한다. 일부 형질변경이 이뤄졌지만 겉흙이 단단하고 두터워 유적의 존재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 주택의 마당 구석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석재 10여점(사진17)이 근래의 대리석자재와 함께 쌓여 있었다.

노 실장은 “아예 도로를 내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 토지·가옥보상 등에 예산이 집행됐기 때문에 공사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도로를 활용해 구불구불한 도로를 내지 말고 고도가 보다 낮은 지점에서부터 일직선 도로를 새로 내고 굴을 뚫듯이 굴착터널을 내야한다. 그것만이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고 미관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주시로부터 도로공사와 관련해 문화재지표조사를 의뢰받은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은 9월18일자로 납품한 조사보고서에서 ‘전체 공사면적 4만7567㎡ 가운데 우암산성에 해당하는 1만7400㎡에서 보다 정확한 시굴조사가, 성안 가옥철거지역 526㎡에서는 표본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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