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협과 이인영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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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과 이인영 최고위원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0.10.0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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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지금은 기억 속에 아련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줄임말이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 동안 대학생이었던 전국의 100만 학도 대부분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대협의 조직원이었다.

당시의 대학생 가운데 ‘나는 조직원이 아니었는데’라고 항변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협의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전대협은 말 그대로 전국 총학생회 대표자들의 협의체였고 전국 대부분의 대학들은 전대협에 가입돼있었다.

전대협이라는 이름 어디에도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 전대협은 ‘이적단체’라는 멍에를 쓴 채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전대협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탄생배경이다. 1987년에 대학에 다녔던 세대들은 ‘뜨거웠던 6월’이란 표현을 기억한다.

당시 연세대생이던 이한열씨가 6월9일 학교에서 열린 시위 도중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의식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튿날 역사적인 6.10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이씨는 그로부터 약 한달 뒤인 7월5일 운명했고 이날 장례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연세대에 모인 총학생회장들이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의 건설을 논의했는데 이날 잉태된 것이 전대협이다.

전대협의 생일은 8월19일이다. 출생지는 대전 충남대다. 전대협의 첫울음은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이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낭창낭창 몸을 움직여가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100만학도의 단결을 호소하던 당시 24살의 젊은이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전대협 1기 의장인 이인영이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정점은 연말 대선이었다. 체육관 선거에서 직선제로 개헌이 됐지만  DJ와 YS의 야권 후보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두 사람을 고려대로 초청해 후보단일화를 역설한 이인영의 모습은 486세대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그는 정치인 이인영으로 변신했다. 철야노동을 ‘전쟁 같은 밤일’로 표현했던 박노해의 詩가 태어난 서울 구로갑이 지역구였다. 2000년 16대 낙선 뒤 17대에는 금배지를 달았다. 이인영 외에도 전대협의 주역들은 ‘386(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 돌풍’을 일으키며 대거 여의도로 입성했다.

386 정치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486으로 업그레이드됐지만 기대처럼 정치판을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2005년 쌀 협상 비준(안)에 찬성하는 등 그들답지 않은 과오를 노출시키며 2008년 18대 총선을 통해 대부분 전(前) 의원이 됐다.

이 전 의원의 장점은 반성과 사과를 하는데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낙선 이후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홀로 걸으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고 “한때 실용이나 중도가 마치 목표인 것처럼 가치전도가 일어났던 것을 반성한다”며 돌아왔다. 그리고 10월3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당의 간판이 됐다. 대권 잠룡인 빅3에 이어 4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된 것이다.

이 최고위원은 총 득표율 11.59%로 당 중진들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여론조사를 뺀 대의원 득표율은 14.6%로 빅3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당초 탈락자 군(群)에 포함됐던 이 최고위원은 돈도 조직도 없었다. 일찌감치 탈계파 정치를 선언했던 만큼 타 후보와의 ‘1인 2표제’ 짝짓기도 여의치 않았다. 

다만 “민주당의 새로운 심장이 되겠다”며 “계파를 초월해 미래 세력에 한 표를 달라”고 호소하고 나선 정공법이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당원, 대의원의 표심에 파장을 일으켰고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인영 최고위원은 7.28 충주 보궐선거 당시 민주당 충북도당으로부터 끈질긴 러브콜을 받았으나 외면했다. “구로를 버리고 내려오는 것은 조강지처를 두고 새 장가를 가는 것이다”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그는 충주고 39회 졸업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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