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소설 ‘임꺽정’ 이미지는 활용하면서 벽초는 철저히 외면
벽초생가, 2008년 보수했으나 안내판·관련자료는 아무 것도 없어

괴산군은 소설 '임꺽정'의 이미지(왼쪽)를 브랜드화하면서 벽초는 외면하고 있다. 생가가 있는 도로 이름도 '임꺽정로'라고 붙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벽초 홍명희 연구의 권위자인 강영주 상명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충북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인가, 그리고 벽초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인가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여러 대학에서 벽초 생가가 있는 괴산으로 답사를 가는데 괴산군은 전혀 관심이 없다. 다른 지역 같으면 유치하려고 야단일텐데···”라고 말했다.
이는 곧 충북이 충북의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와 일맥상통한다. 충북에는 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으나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있다. 벽초는 ‘레드 콤플렉스’에 갇힌 자들에 의해 외면받고, 단재는 사당논란에 이어 동상건립으로 시끄러워 여전히 편치 못하다. 그리고 운보 김기창은 사후에 집을 잃었다. 운보의 집은 현재 외지인에게 넘어가 본래의 모습을 잃은지 오래다. 운보의 집이 아니라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 나오는 탁구 생모의 집으로 불리고 있다. 기가 막힌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충북 괴산에는 벽초 홍명희 생가가 있다. 이 곳에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이면서 일제에 항거해 충북최초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던 항일운동가 벽초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청주에서 괴산읍내까지는 자동차로 40분가량 걸린다. 괴산군은 괴산읍내 초입에 소설 ‘임꺽정’의 캐릭터와 청결고추를 이미지화한 상징물을 자랑스레 세워놓았다. 이 곳의 브랜드인 셈이다. 그러나 괴산군에서 벽초는 아직도 외면당하고 있다. 항일독립운동가로 항일합방에 항거해 순국까지 한 벽초의 아버지 일완 홍범식이 이름을 드러낸 것도 몇 년 되지 않는다. 누구나 알다시피 벽초가 월북했고 부수상을 지냈다는 이력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괴산읍 동부리 벽초생가. 괴산군은 도비를 합쳐 지난 2002~2008년 20억원의 예산을 들여 생가 보수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안내판과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

홍명희 생가 아닌 홍범식 고택
현재 동부리 벽초의 생가 표지판도 ‘홍범식 고택’으로 돼있다. 하지만 이 곳을 관통하는 도로 이름은 ‘임꺽정로’다. 괴산군은 지난 2002~2008년 20억원의 군비와 도비를 합쳐 벽초생가를 보수·정비했다. 이 집은 1730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조선시대 중부지방 양반가옥의 건축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2002년 충북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됐다. 문화관광해설사 허영란 씨는 “홍명희 생가라고 표기했으나 보훈단체 반발로 썼다 지웠다 하기를 여러 차례 했다”고 말했다.

허 씨는 또 “이 곳에서 지난 8월 27일 홍범식 순국 100주기 제례를 지냈다. 그런데 보훈단체 눈치보느라 벽초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행사를 조용히 치렀다”고 전했다. 보수하기 전 벽초생가는 ㅁ자 형태의 사랑채만 남아 있었다. 자칫했으면 벽초에 대한 ‘붉은 꼬리표’ 때문에 이 생가마저 허물어지고 말았을 뻔 했던 것을 괴산군과 충북도가 예산을 세워 복원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도식적인데다 드라마 세트장처럼 말끔해 너무 현대적이라는 평도 있다. 주민들은 돌담과 나무 같은 것을 모두 제거한 것에 대해 서운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홍명희 생가가 아니고 홍범식 고택이라고 표기한 표지판.

그런데 생가 앞에는 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과 화장실만 덩그러니 놓여있지 어디를 봐도 안내판이 없다. 홍범식과 벽초에 대한 안내 자료 역시 아무 것도 없다. 괴산군에서는 ‘예산확보 중’이라고 말했으나 생가 복원공사가 끝난 것은 이미 지난 2008년이다. 아직까지 안내판 한 개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충북도 관계자는 “박물관이될지 기념관, 문학관이 될지 모르지만 연차적으로 건립할 계획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벽초의 항일정신과 문학정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곳을 채울 자료가 있을까. 괴산이 고향인 허 씨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여기와서 놀았다. 그 때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였다. ‘공산당이 살던 집’이라고 알려져 있어 이 집에 있던 물건을 깨버리고 오래된 책들을 아궁이에 넣고 태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어른들이 우리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벽초 생가를 이런 식으로 막 대했으니 무슨 자료가 남아 있겠는가.

괴산군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들이 벽초 생가 뒷쪽에 세운 평화통일 기원탑. 벽초 생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웬 평화통일 기념탑?
유서깊은 집을 뒤로 하고 나오던 중 기자는 생가 바로 윗쪽에서 우리나라 지도모양을 본뜬 조형물을 발견했다. 괴산군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들이 지난 2007년 2월에 세운 평화통일 기원탑이었다. 임각수 군수 외 45명의 위원들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괴산군민의 소망을 담아 탑을 세우고 타임갭슐을 묻는다”는 문구도 새겨넣었다.

올라가보니 군은 이 탑을 세우기 위해 도로까지 개설한 흔적이 있었다. 경사진 도로는 그 부근에서 끊겼고, 탑 주위 평평한 곳에는 술병과 각종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벽초에게는 아직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평화통일을 기원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지도모양의 조형물도 벽초 생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홍명희문학제 같은 행사에는 인색한 괴산군이 이런 곳에는 예산을 펑펑 쓰고 있는 것이다.

박걸순 교수는 “벽초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북한에서 부수상을 지낸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것은 그 것대로 평가돼야 하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으며 ‘임꺽정’을 저술한 것은 그 것대로 평가돼야 한다. 이념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강영주 상명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홍명희문학제는 15년이나 되었고 문인들의 호응도 크다. 그런데 예산은 가장 적고 초라하다. 지자체에서 나서 큰 규모로 키워야 할텐데 너무 가슴이 아프다. 충북은 문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충북의 현실이고, 수준이다. 괴산의 문화유산이나 가볼만한 곳을 소개하는 모든 자료에 벽초 생가는 ‘홍범식 고택’이라고 작게 처리돼 있을 뿐이다. 충북도가 펴낸 자료집에도 벽초 생가는 없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하는 전국의 대학생들은 벽초 생가를 보러 온다. 충북도와 괴산군, 그리고 보훈단체들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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