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종법위원회·종리연구원 조직 종단 장기발전 청사진 구상
1991년 이법산, 양도향 총회장 ‘대도발전 1차 5개년 계획’ 발표
2004년 제3대 도주 월란 교리 확립·조직 체계화 업적 남기고 열반

▲ 개도성탄절 총회 후
1986년(개도 113년) 4월 도주 직속으로 ‘종법위원회’를 조직하고 장남인 법산 이경구를 총회장에 임명했다. 종법위원회는 금강대도의 종통을 수호하는 최고 심의기관으로 장기 발전계획의 청사진을 짰다. 11월에는 산하 청년도인 육성단체인 백운도우회에서 ‘오만등대(五萬燈臺)’ 제2집을 발간하여 전국의 연구원, 도서관 및 학자들에게 기증함으로써 적극적 포덕의 기틀을 삼았다. 12월에는 종법위원회 산하에 ‘종리연구원(宗理硏究院)’을 조직하여 금강대도 종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홍보를 담당케 했다.

1987년 봄부터 금천리 일대에 표고버섯을 재배하여, 일하면서 수도하는 근로의식 고취와 경제 자립기반 조성의 거도적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25일 금강대도를 신앙하다 선화(仙化)한 제자들을 천도, 봉불하는 의식을 베풀었다.

즉 평소 신앙의 열성과 금강대도 발전에의 공헌도를 고려하여 의성사(義誠師), 성경사(誠敬師), 봉성사(奉誠師), 봉도사(奉道師), 봉덕사(奉德師), 성신사(誠信師), 경신사(敬信師), 정신사(正信師), 봉신사(奉信師), 평신사(平信師) 등 10등급으로 구분하여 도직첩을 하사했다. 이들은 1년 두 번, 즉 금강개도성탄절과 연화개도성탄절에 제사를 받드니, 이는 생사극락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 덕성사부님 성갑헌수식
▲ 덕성사부님 열반
최근에는 독신자의 조상들까지도 천도하는 사업을 진행 중인데, 이는 ‘칠세조상이고등락(七世祖上離苦登樂)’이라 하여 독신자의 7대조까지도 극락 천도시킬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1988년 11월 25일 천도된 선, 불들의 자손들이 ‘봉불회(奉佛會)’를 조직하여 건곤부모에 대한 성은보답과 조상을 추존, 공경하는 사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금강삼종덕성사부 성탄 60주년 봉축사업 추진

1989년 의성탑(義誠塔)을 준공하고 그 주변을 성경대(誠敬臺)로 명명했다. 의성이란 금강대도인의 모든 수행과 신앙의 상징으로서 그동안 대도덕성사건곤부모의 도덕개화 사업에 ‘불감사기신(不敢私其身) 불감사기재(不敢私其財)’의 정성으로 보필한 제자들의 공덕을 상징, 찬미하기 위하여 의성탑을 건립했다. 금강대도에는 도성보(道聖寶), 도법보(道法寶), 도제보(道弟寶)의 삼보가 있는데, 이 의성탑과 성경대는 그중에서 도제보(건곤부모의 문하에 8사, 5사, 108군자, 9800古名過 등의 수제자가 배출되어 후손들의 추존을 받는다고 한다)를 상징하는 것이다.

1990년 5월 19일, ‘삼종학원부설교육원’을 설립하여 우선적으로 인근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하였고 장기적으로 고등과정은 물론 유치원 과정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11월 25일 ‘연화대도현숙정정회 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연화도인들로 하여금 가내수공업을 통한 재정자립기반 조성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또한 성경도우회(誠敬道友會)를 발족해 청장년 도인들의 지원 육성을 도모했다. 

▲ 삼종대학 교육원 입학식
▲ 일본 동경회관 개관
1991년 1월 5일에는 이법산, 양도향 총회장의 주도로 ‘금강삼종덕성사부성탄 60주년 봉축사업’의 일환인 ‘대도발전 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 사업의 의의는 제3대 도주 탄신 60주년(1994년)을 기해 그동안 무극적으로 은도해 왔던 금강대도의 체제를 태극적 개화시대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다각적인 준비사업을 추진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예악정비사업, 종리학 수립사업, 인재육성사업, 교화조직 정비사업, 성전 및 문화회관 건립사업, 성산봉안사업, 의약방 체계화 및 의료원 설립사업 등이다. 또한 금강대도의 소식지인 “성경(誠敬)” 창간호를 3월에 발행했다

종리학회 창립, 학문적 자리매김 역할

1999년(개도 126년) 7월 ‘종리학회(宗理學會)’를 창립했다. 종리학회는 내부적으로는 삼종대학 교수진 간에 대도 종리에 대한 활발한 토론과 학문적 체계화를 유도하고, 대외적으로는 외부의 학자들과 교류를 통하여 대도덕성사건곤부모님의 역사적 신원과 대도 사상의 선양은 물론, 종리학(宗理學)을 보편적인 학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 종리학회 세미나
▲ 조상 천도봉불
2000년(개도 127년) 6월8일 대도의 인재육성을 위해 삼종대학 교육원 체제를 금강삼종대학(金剛三宗大學)으로 승격시키고 이듬해 금강삼종대학 대학원을 설치했다. 2001년에는 1941년 일제에 의해 법당이 강제로 철거된 신사사변 60년 만에 삼종대성전(三宗大聖殿)을 준공했다.

또한 덕성사부 월란은 삼종대성전 준공식 석상에서 그동안 종법위원회 총회장을 맡아온 이법산, 양도향에게 각기 “대종법사(大宗法師)” “대종덕사(大宗德師)”라는 사호(師號)를 내려주었다. 이는 금강대도 종통이 제4대 도주인 대종법사, 대종덕사에게 이어짐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2004년 6월 금강대도의 제3대 도주 월란은 71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고 전국의 수십만 제자들이 3년간 중복으로 애도를 다했다.

덕성사부 월란은 금강대도의 모든 시련기를 끝내고 실질적인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던 종교지도자였다. 특히 60~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부흥기에 대도의 교리와 의례를 확립해가면서 교화 조직의 체계화와 금천 성지의 현대화, 그리고 경제 안정 및 인재 육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금강대도는 오늘날 계룡산에 터 잡은 충청도의 신종교 중에서 가장 건실한 발전을 해온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 성경대

弔辭

이월란 선생을 추모하며…
황필호 동국대 명예교수

이월란 도주님! 아니 이일규 선생! 아무래도 여기서는 선생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사실 선생과 나는 1950년대 초 청주고등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지만, 그대가 대중의 우러름을 받는 도주님이시기에, 여기서는 친구로서 보다는 이 시대의 구원에 힘쓴 한 종교가요, 사상가로서 존경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선생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이월란 선생은 금강대도라는 한 종단의 지도자로서 남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약 20여년 전에 동문으로서 금강대도 발전에 도움이 돼 달라는 부탁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제가 젊을 적에는 철이 없어서 그 중요한 의미를 잘 몰랐기에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0여년이 지나서 저도 학계에서 은퇴를 해야 할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만나고 보니, 반가운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왜 진작 만나서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돼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행히도 몇 년 전 선생의 장자이며 금강대도의 대종법사이신 이경구씨를 만나서, 비록 학계에서도 정년을 마친 노구의 몸이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시대 인류 구원에 뜻을 같이 해볼까 했더니, 이렇게 허망하게 먼저 우리들 곁을 떠나시게 되니, 이 얼마나 비통하고 허망한 일입니까?

이에 제가 살아서 선생의 영전에 조사를 바치게 되다니, 참으로 가슴이 메입니다. 몇 년 전 수십 년 만에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건강이 원활치 않았음은 알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워낙 젊을 때부터 정신력이 강인하셨고, 또 금강대도의 제3대 도주님으로서 앞으로도 하셔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느꼈기에 선생이 이렇게 느닷없이 저 세상으로 떠나시다니, 이 어찌 믿을 수 있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이른 아침에 선생을 건곤부모요 미륵대불로 신봉하는 금강대도의 수많은 도인들과 평소에 선생을 존경해 마지않았던 언론계와 학계, 관계의 여러 인사들이 모여서 어찌 할 수 없는 슬픔을 참고 선생의 명복을 비는 영결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서서 선생의 죽음을 친부모의 죽음처럼 애도하고 슬퍼하는 많은 도인들의 눈빛과 애잔한 흐느낌으로 펄럭이는 수천의 만장을 보면서, 당신께서 우리 곁을 떠나심이 결코 허무한 이별이 아니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참으로 많은 유산을 남겨 두고 가셨음을 느끼게 됩니다.

순수한 열정과 경륜, 그리고 자비심을 모두 갖춘 종교인이 드문 요즘, 선생은 금강대도인은 물론이고 종교계와 학계에서 신선함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금강대도의 제3대 도주위에 오르신 이후에 대도의 교리와 사상 및 의례를 체계화하였고, 특히 전국 각지에 본원을 설치하고 금강삼종대학을 설립하는 등 포덕과 육영사업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금강대도와 연화대도의 개도 100년 기념 성역화사업을 통해 총본원의 면모와 체계를 갖추신 일은 한국 신종교계에서도 매우 드문 일로서 선생의 가장 큰 공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대도에 대한 공부가 짧아서 대도의 독특한 용어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대도의 역사를 읽어보니, 선생께서는 말 그대로 고구물석(苦口勿惜)하며 염념존성(念念存誠)하신 분이 아니신가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뒤에 남아 있는 우리 후배들에게 인생을 얼마나 철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신 어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서 최근 몇 년 동안 지병으로 신체의 고통을 겪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것도 중생들의 아픔과 죄를 대신하시려는 대자대비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은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선생은 우리들 곁을 떠났지만 선생이 남기신 위대한 가르침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가슴 속에, 그리고 당신을 존경하는 우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불빛으로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역사는 오늘 우리가 위대한 선생과 함께 하였음을 성스럽게 기록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금강대도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찬란한 등불로 영원히 남아 주시기를 삼가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을 떠나보내는 유가족 여러분들과 위대한 스승을 잃게 된 금강대도의 여러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부족한 추모의 글을 마칠까 합니다.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2004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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