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 지위 불변
연도 미상 고려활자 ‘복·전’ 이미 남북에 존재

지난 1일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년)보다 최소한 138년 먼저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으로 알려진 ‘남명천화상증도가’의 활자로 추정되는 증도가자 12점이 발견되면서 최고 논쟁이 불붙고 있다.

그러나 직지가 책이고 증도가자는 활자라는 점에서 직접 견줄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설사 증도가자로 추정되는 활자가 공인을 받는다하더라도 직지는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이고 증도가자는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로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인정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직지의 본향임을 자부해온 청주시 당국은 물론이고 주민들도 증도가자의 공인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양상이다. 직지와 증도가자를 둘러싼 논란의 이모저모를 분석해 봤다. 
 
남명찬화상증도가와 상정고금예문

▲ 2일 서울 인사동 다보성고미술전시관에서 증도가자의 발견과 관련해 공개행사를 진행하는 남권희 교수.
증도가자라는 이름은 한국서지학회장인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붙인 것이다. 남 교수는 ‘남명천화상증도가’를 인쇄한 활자로 추정되는 만큼 ‘증도가자’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증도가는 원래 당나라 승려 현각이 깨달음의 경지를 시편으로 쓴 것인데 고려의 고승인 남명선사가 이를 편저했기에 남명천화상증도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전하는 책(보물 제758호)은 1239년(고종 26) 실권자인 최우가 공인을 뽑아서 주자본(금속활자본)을 그대로 목판에 복각한 이른바 번각본이다. 목판본 증도가에는 “이전에 고려에서 주자본으로 간행한 증도가가 있었지만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아 각공들에게 이를 목판본으로 복각케 했다”는 발문이 있다. 직지보다 최소한 138년 앞섰다는 주장도 이 번각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나아가 고려 문장가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는 고종 21년(1234)에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역대 시가집을 펴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역시 문헌상으로는 직지보다 143년 앞서지만 책도 활자도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금속활자는 여러 권을 찍기보다는 다양한 책을 찍는 역할을 했으므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을 해체해 목판에 붙인 뒤 복각하는 번각본을 다수 발행했다. 직지와 같은 흥덕사자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비도량참법집해의 번각본은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지난 7월 보물 1653호로 지정됐다. 

발견경위 불투명 진위여부 불확실

▲ 남권희 교수가 증도가자라고 주장하는 12자 가운데 번각본과 같은 고자(古字)가 사용된 明활자.
지난 1일 증도가자의 존재를 언론에 흘린 뒤 2일 활자를 공개하는 행사를 가진 것은 남권희 교수다. 그러나 남 교수는 연구자일 뿐이고 5년 전 남 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한 이는 서울 인사동에서 다보성고미술전시관을 운영하는 고미술 수집가 김종춘씨다. 김씨는 이 활자들을 10여년 전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수집경로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남 교수는 이 활자들이 증도가를 찍는데 쓰인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목판본 증도가와 비교할 때 글자 모양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명(明)·소(所)·어(於)·보(菩)·선(善)·평(平)·방(方)·법(法)·아(我)·복(福)·불(不)·자(子) 등 12자를 목판본 에서 찾아보면 같은 모양이 관찰된다”고 주장했다. 남 교수는 특히 “활자 가운데 ‘명(明)’ 자의 경우 지금과는 다른 옛 글씨(古字)로 쓰였는데 육안으로 봐도 그 모습이 일치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확한 연대 측정을 위해서는 탄소연대측정 등을 거쳐야 하는데 활자를 만든 청동에는 철과 달리 탄소가 들어있지 않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활자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먹을 통해서도 연대를 측정할 수 있지만 활자를 훼손하지 않고 먹을 추출하는 것 또한 여의치 않다. 
 
어쨌든 교과서 크게 바뀔 일 없다

▲ 고려금속활자에 대한 연구는 남북이 함께해야할 과제다. 사진은 개성박물관에 있는 금속활자 관련 김일성 교시(2008년 1월 촬영).
어찌 됐든 증도가자로 주장하는 활자의 제작연대가 확인되더라도 교과서가 크게 바뀔 일은 없다. 직지는 책이고 증도가자는 활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까지 발견된 고려활자가 2점에 불과하고 그 연대도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증도가자가 고려활자로 확인될 경우 그 의미는 역사적으로 기릴 만하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활자는 남한의 복(山+復) 활자와 북한의 전(顚) 활자가 있다. 개성의 고려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복활자는 1913년 일본인이 덕수궁박물관에 넘긴 것으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북한의 개성박물관에 있는 전 활자는 1958년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된 것이다. 두 활자는 모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나 연대가 분명치 않다.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의미가 있는 것은 책이다. 활자는 책을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상정고금예문이나 증도가의 문헌상 존재는 이미 교과에서도 나와 있던 것이다. 어쨌든 직지는 책이 전해져오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황 실장은 직지를 찍은 흥덕사자는 밀랍주조방식이고 증도가자는 주물사주조방식이라는 차이점에 대해서도 “밀랍이 됐든 주물사가 됐든 이는 청동기 제조에 이미 사용됐던 것으로 기술상의 우열이 있는 게 아니다. 고대부터 내려온 주조기술이 고려시대 들어 인쇄와 접목됐다는 것에 의미를 두면 된다”고 설명했다.



고인쇄박물관 2007년 증도가자 외면했나?
“소장자가 주장하는 ‘千자’는 활자가 아니었다”

증도가자로 주장하는 활자가 최고 논쟁을 빚으면서 ‘수년전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증도가자를 들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고 청주시가 매입여부를 고민했었다’는 설이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확인 결과 당시 활자가 증도가자일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황정하 학예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2007년 고려활자라며 고인쇄박물관에 감정을 의뢰한 사람이 있었지만 천(千)자로 보이는 금속조각은 모양이 글씨와 똑같아 활자로 볼 수 가 없었다”고 밝혔다. 활자는 인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모양 같이 좌우가 전도된 것이 정상이다.

황 실장은 “직지 또는 금속활자와 관련해 문의나 제보를 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심지어 팸플릿에 있는 직지 사진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다. 박물관 측에서는 가치가 있는 소장품은 최대한 매입하려 한다. 그래서 ‘고인쇄박물관을 직지박물관이라고 개칭하자’는 각계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명칭을 지키는 것이다. 직지를 모토로 한국의 고인쇄 문화를 망라하는 박물관을 지향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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