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출신 염형철 등 폭염 속 극한 시위
MB불통 정치권 외면 안타까운 선도투쟁

내러티브 리포트

등장인물

염형철

1994년 청주환경운동연합 탄생의 산파. 청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의 대명사로 통했다.  2000년 대통령자문기관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간사로 발탁되면서 청주를 떠났다.

 이듬해 김대중 정부의 새만금사업 추진에 반발해 환경운동가들이 정부기구에서 철수하면서 환경운동연합 중앙사무처로 자리를 옮겨서 2008년까지 활동했다.

2009년부터 서울환경운동연합에서 사무처장 등으로 일하다가 7월22일 새벽 기습적으로 동료 2명과 함께 사다리를 타고 30m 이포보 공도교 교각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갈 사다리를 부쉈다.

박창재

1995년 청주환경운동연합 조직국장으로 환경운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1999년 염형철 국장으로부터 사무국장 바통을 이어받아 2007년까지 청주지역 환경운동을 이끌었다. 2008년 환경운동연합 중앙사무처로 옮겨 전략운영국장, 조직국장 등을 맡아왔다.

서울행은 중앙의 부름도 있었지만 운동의 시야를 넓히려는 바람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말부부로 사는 고통도 감수하고 있다. 7월22일에는 염 처장이 올라갈 때 밑에서 사다리를 잡았다. 그 이후 현재까지 상황실을 지키고 있다. 8월31일 현재 월말부부다.  

하늘이 분노한 날이었다. 전국에 폭염주의보·경보가 내려진 7월21일, 스마트폰 내비게이션만 믿고 경기도 여주군 이포보 고공농성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낯선 길을 더듬어가는 시선의 끝에서는 달궈진 아스팔트가 끊임없이 일렁거렸다. 언제부턴가 에어컨 바람도 청량감을 잃었다. 1시간30분을 달려온 나의 애마도 뜨거운 숨을 토하고 있을 터였다.

이포대교에 이르자 이포보 위에 ‘국민의 소리를 들으라’는 대형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끊임없이 펄럭이는 글자들의 외침과 달리 강물은 뒤척거림도 없이 숨죽여 흐르고 있었다.

현장에 임박하자 좁은 도로 갓길에 18대의 전경차가 산성처럼 도열해 있었다. 파사성(삼국시대에 쌓은 산성)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는데 두 남자가 다가왔다. 그들의 눈빛은 검색대의 렌즈처럼 나를 훑고 있었다.

“경찰이십니까?” “아닌데요.” “여기 차를 대는 건 상관없는데 지난주에도 4대가 부서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1000여명이 몰려와 공사찬성 집회를 할 겁니다. 관광버스도 여러 대 오기 때문에 차를 빼기도 힘들 겁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일상적인 듯 말투도 책을 읽는 듯 건조했다.

무슨 얘기인지 곱씹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부근에는 차의 어깨를 걸쳐둘 갓길도 없었다. ‘어서 오세요. 양평군입니다’라는 표지판을 만나서야 비로소 차를 댈 수 있었다. 상황실이 있는 장승공원까지 가는 동안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걸었다. 등 뒤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몸이 쉴 새 없이 휘청거렸다. 그렇게 10분여를 걸어 박창재 상황실장을 만날 수 있었다. 상황실은 한 칸짜리 천막과 책상 4개가 전부였다. 박 실장은 구릿빛 얼굴에 부용꽃 같은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 
 


자전거 공도교 만드는데 3600억…억!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한 인간의 욕망에 빗대 이포바벨탑이라고 부르는 농성장은 어떤 식으로든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상황실이 있는 장승공원으로부터는 물을 건너가더라도 직선거리로 320m. 현장은 철저히 봉쇄돼 있었다. 중고 캐논 85mm렌즈로는 당겨지지도 않았다.

“저기가 도대체 뭐하는 뎁니까?” 나는 솔직히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박평수 고양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 장동빈 수원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등 세 사내가 한 달째 농성 중인 구조물의 용도에 대해서도 몰랐다.

“이포보는 저 앞에 있고 40% 공정이 진행됐습니다. 법정 홍수기인 6월21일~9월20일까지는 안전문제 때문에 하천 내 모든 공사를 중단하게 돼있는데도 말입니다. 농성장이 있는 곳은 자전거 전용 공도교(公道橋)의 교각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강을 건너라고 만드는 다리의 공사비가 무려 3600억원이니…. 보가 아니라 사실상 댐이고 모든 게 운하의 전초행위로 볼 수밖에 없죠.” 담배연기와 함께 박 실장의 탄식이 뿜어져 나왔다.

정부가 경제논리를 가지고 운하를 하려다가 단박에 깨지고 난 뒤 생태 살리기와 홍수 예방, 관광 활성화 등을 내세운 4대강 공사로 변질됐다는 얘기다. 명분만 놓고 보면 반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전문가의 눈길에도 어마어마한 공사현장은 명분의 달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인위적인 교정이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이 불러올 거라는 불안감이 등줄기에서 끈적거렸다. 연신 손부채를 부쳐도 더위는 가시지 않는데 말이다.

박 실장이 근거를 제시했다. “홍수는 강물범람보다 도시침수가 문젭니다. 본류는 홍수와 거리가 멉니다. 2002년 태풍 루시와 2003년 매미로 인한 제방피해 563건 가운데 국가하천 피해는 4건에 불과합니다. 환경이요? 준설한다면서 모래를 긁는 것도 모자라 폭약으로 수중암반을 깨뜨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주장만이라도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34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데 모두가 삽자루를 들었을 때 얘기죠. 중장비에 의존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할수록 일자리는 줄어듭니다. 그래서 홍수기에라도 공사를 일단 중단하자고, 검증기구를 만들자면서 저 꼭대기에 열흘을 작정하고 올라간 건데 청와대도 정치권도 전혀 반응이 없어요.”

하루 900만원짜리 호텔, 룸서비스는…

오후 2시가 되자 강 건너에서 선무공작이 시작됐다. ‘여주발전을 위해서 주민들은 4대강 공사를 찬성하니 외지인들은 물러가라’는 내용이 확성기를 통해 1시간 동안 앵무새처럼 반복됐다. 30m 고공 위 10m×15m의 고립된 공간에서 31일째 저 방송을 듣고 있을 사내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고독이 내게도 공명(共鳴) 현상을 일으켰다.

박 실장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농성장 교각 아래 부분에 상판이 보이죠? 거기에 무술경관들이 올라와 텐트를 쳤어요. 밤에는 농성장을 향해 서치라이트를 비추거나 욕설을 퍼붓고 쇠붙이 같은 걸 두드린다고 합니다.”

▲ 농성자들은 50여끼를 선식과 물로 때웠다.<염형철 트위터>
세 사내의 숙박비는 하루 900만원이다. 수원지법 여주지원 민사부가 하루 전인 20일 이포보 하청업체인 상일토건 등이 염 처장 등 3명을 상대로 낸 공사장 퇴거 및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퇴거하지 않을 경우 1인당 하루 300만원씩 배상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23일 집행관 2명 등을 올려 보내 농성장 5m 아래에서 이 같은 결정을 구두로 통보했다.)

결정 이후에도 룸서비스가 달라진 것은 없다. 세 사내는 18일 동안 약 50여끼의 선식과 하루 2리터의 물로 연명했다. 이후에는 라면과 햇반, 단무지가 두레박을 타고 올라간다. 업체 측이 제공하는 하루 900만원짜리 룸서비스다. 

염 처장은 최근 트위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점거 1주일 정도가 지나면서 업체 측에서 무전기 배터리를 전달해달라는 심부름을 거부해 한동안 교신이 끊기기도 했다. 장동빈 수원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이 수동손전등을 개조해 휴대폰 배터리 충전기를 만들면서 그나마 휴대폰 사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아침은 역시 선식이다. 45번째. 이것으로 섭취할 수 있는 열량은 성인 필요량의 5분의 1 수준이며 이제는 물려서 토할 것 같다.” 이는 염 처장이 휴대폰을 통해 전해온 농성 27일 차 일기의 일부분이다. 

짧은 교신 “내려가서 같이 싸워야지”

고공농성장과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한동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손전등을 개조한 충전기는 손으로 시간을 돌려야 10분 정도를 통화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성 31일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한 중앙의 방송사 기자들도 교신을 원하고 있었다.

▲ 손전등을 개조한 휴대폰 충전기<염형철 트위터>
3시30분 박 실장의 휴대폰을 통해 320m 앞 바벨탑과 교신이 이뤄졌다. 첫 물음은 어처구니없게도 “왜 올라갔냐”는 것이었다. 그만큼 나는 떨렸다. “염형철 처장입니다. 강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올라왔습니다.” 위태로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오히려 밝고 우렁찼다.

“일단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논의가 이뤄지길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국회나 시민사회가 움직여야죠. 생각했던 것보다는 농성이 길어지고 있는데 내려가서 같이하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귀환을 가로막는 것은 상판 위의 무술경관도 4개 중대의 경찰병력도 아니었다. 소통을 거부하는 정부, 애써 외면하는 정치권, 무관심한 사회였다.

31일 동안 그가 도를 닦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들어온 문에 못질을 하고 깨닫기 전에는 나가지 않는 ‘무문관(無門關)’ 수행처럼 말이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니 이 정권의 뻔뻔함, 억지와 허구성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이 보라고 하는데 27m 거대한 시설의 실체를 굽어보니 어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농성은 이를 몸으로 폭로하는 겁니다.

1시간 동안 작은 발전기를 돌릴 수고가 안쓰러워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는 이 사람 저 사람 안부까지 묻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바벨탑의 사내들은 트위터를 통해 “첫째 우리는 정부가 보라고 주장하는 시설에 대해 우리 스스로의 몸을 직접 맞춰서 보여줌으로써 보가 아니라 댐이라는 실체를 드러냈고 같은 유형의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의 진실을 밝혔다고 생각한다. 둘째 국책사업이라고 하면 무지막지하고 철옹성 같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4대강 사업의 핵심 현장을 가볍게 차지했다. 우리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올라설 수 있고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라고 당당히 밝힌 바 있다.

▲ 노끈을 풀어 실을 만드는 고공농성장의 상황<염형철 트위터>

31일 동안 5000명이 현장에서 지지하다

이날은 농성 한 달을 맞아 주민들의 대대적인 4대강 공사 찬성시위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4시가 되자 시내에서 집회를 마친 주민들이 관광버스를 이용해 현장에 집결했다. 주민들은 확성기를 단 차량으로 농성장 주변을 맴돌고 인간 띠를 만들어 농성장 주변을 에워쌌다. 경향신문 기자는 이날 주민들의 시위가 관제데모라는 기사를 취재해 송고하고 있었다.


박 실장은 “댐 주변지역 주민들에게는 법적으로 보상과 지원이 가능하지만 보는 그와 달리 주민들을 지원할 법적근거가 없다”며 “주민들이 착각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 군수와 이장 등이 주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주말을 맞아 전국 각처에서 농성을 지지하는 발길도 이어졌다. 주말에는 500여명이 찾는 등 지금까지 방문한 사람의 누계는 5000명 정도라고 한다. 단체로 방문이 이뤄지면 농성장에서도 현수막을 들고 호응한다는데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현장에 설치된 망원경을 이용하니 염 처장 등 세 사내의 움직임이 한 눈에 들어온다.

▲ 농성을 지지하기 위해 방문한 어린이.

방문객들은 손수건 크기의 헝겊에 농성을 지지하는 문구를 써서 현장에 매달고 바벨탑을 향해 날릴 방패연을 만들기도 했다. ‘4대강을 살려 달라’는 바람을 고사리 손으로 적는 아이들도 있다. ‘MB의 뇌구조’라는 현수막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사람의 머리를 그린 그림 속에 로봇물고기와 삽자루가 있었다.

오후 5시 현장을 떠나기 위해 양평군과 경계에 세워뒀던 차를 타고 나오는데 하늘에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네댓 대 날고 있었다. ‘농성자들을 지지하는 격려비행일까?’ 궁금한 마음에 차를 세우고 줌렌즈를 최대한 빼서 패러글라이더를 조준했다. 낙하산에 선명한 ‘여주도자기축제’ 등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격려비행이 아니라 위협비행인 셈이다. 하늘이 시려 눈물이 찔끔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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