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한(恨)까지 이해해요
외국인은 아직도 우리에게 큰 호기심을 준다. 이것은 관심과 배려일수도 있다. 21세기의 대명제인 글로벌시대, 이를 아주 쉽게 풀이한다면 한국인의 외국화와 외국인의 한국화로 정리될 것이다. 충북의 외국인들은 지금 어떤 공간과 시간속에서 호흡할까. 충청리뷰가 그 내면을 엿보기로 했다. 다년간 충북에 정착하며 또 하나의 ‘충북인’을 그려내는 그들의 애환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 볼 참이다.

지나 비네티(Gina L. Binetti)씨(45세), 그녀의 한국 이름은 양예진(洋藝眞)이다. 굳이 의미를 붙인다면 넓은 바다와도 같은 아름다운 ‘참’이 될 것이다. 세계적 상표인 산도스와 시바-게기로 유명한 스위스 바젤(Basel)이 고향인 그녀(이하 지나)는 꼭 10년전인 91년 12월 한국에 왔다. 현재 벤처기업인 (주)세일하이텍(대표 박광민. 청원군 오창면 화산리)의 해외무역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나씨의 밖으로 드러난 일상은 물론 이 회사의 무역업무다. 컴퓨터를 조작하고 서류를 챙기며 해외 바이어들을 상대하는 것 등. 해외 무역을 외국인이 맡는다면 바이어들에겐 이보다 더한 편안함이 없다. 우선 말이 잘 통하고 대화에서도 정곡을 찝어낼 줄 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지나씨의 글재주를 가장 아낀다. 외국어로 작성되는 서류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세련된 단어만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한국말의 “식사하세요”와 “진지드세요”는 느낌의 차이가 크다. 이런 어휘의 마술을 지나씨가 부리고 있고 그 결과는 곧바로 해외영업 실적으로 나타난다고 회사 책임자는 소개했다. 10년간의 한국생활로 그녀의 한국말은 비록 유창하지 않지만 어지간한 의사소통은 자유롭다.

세련된 어휘 구사 글재주

그녀는 말한다.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겠다.” 과연 무엇이 이처럼 지나씨를 확신범으로 만들었을까. 대답은 한마디로 정리됐다 “여러 나라를 다녀 봤지만 한국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나에겐 고향이나 다름없다. 한국의 모든게 나한테 위안을 준다.” 지나씨의 한국예찬은 다소 감상적이고 현학적이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 얘기를 주문했다. “지난 94년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보육원을 후원한 적이 있다. 매주 주말 이곳을 찾아 어린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그 때 나는 이들의 티없이 맑은 표정에서 엉청난 감흥을 느꼈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힘이 되는한 그들을 돕고 싶었다.(그녀는 지금도 시설아동 4명을 정기 후원하고 있다) 이것이 우선 나를 붙잡았다. 다음은 한국의 역사다.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은 먼저 외민족을 괴롭힌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이것을 한국인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사회적 안전(Security)에서 느꼈다. 아무 때나 가고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누구와도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스위스적인 요소를 한국이 고스란히 같고 있더라. 편안함은 곧 서로 통(通)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 좋고 특히 충북이 마음에 든다.” 이처럼 그녀의 말은 현실에 귀착하는 듯 하다가도 느닷없이 형이상학으로 흐른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편안함과 안전함이 곧 한국사랑

지나씨의 성향은 역시 물리(物理)보다는 문리(文理) 쪽이었다. 그녀는 지금 괴산의 한 한적한 마을의 농가에서 산다. 본인이 돈을 모아 직접 구입한 것이다. “한국 전통의 흙벽 집인데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집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 이 곳에 가만히 누워 내가 좋아하는 한국노래를 듣는 것, 나에게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지나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對象)’은 촘촘히 수첩에 적어 놓고 있다. 좋아하는 가수를 묻자 갑자기 환하게 얼굴을 펴더니 이동원과 장사익을 금방 말했다. “이들의 노래는 그 자체가 느낌”이라는 그녀는 학창시절엔 75년 사망한 흑인 가수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을 특히 좋아했다. 가스펠 싱어인 그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루터 킹목사의 친구이기도 하다. 이동원과 장사익, 마할리아 잭슨 등 이정도면 뭔가 잡히는 것같았다. “혹시 격정적이고, 가슴속에서 토해내는 듯한 노래를 좋아하는게 아니냐”고 직설적으로 묻자 지나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각별히 여기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향수(이동원의 노래), 사물놀이, 한복, 흙집, 피아니스트 임동창, 어린 아이 등 등. 임동창은 스님 분위기가 나서 좋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서도 종종 격정(!)이 묻어 난다. 죽을 때까지 아이들을 돕고 싶고, 죽을 때까지 이 회사에 다니고 싶고,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지나씨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가 한국의 한(恨) 문화에 원초적 교감을 갖는다고 확신했고, 그래서 과거의 역정이 더욱 궁금해 졌다.

실제로 노래 ‘향수’에 대한 지나씨의 집착은 상상을 넘는다. 시인 정지용과 그가 쓴 ‘향수’, 그리고 향수를 노래한 이동원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 “시(詩)로서의 향수보다는 노래로서의 향수를 먼저 알았다......” 그녀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도 “더 이상 묻지 말라”며 입을 닫았다. 인터뷰에 배석한 회사 대표 역시 잠시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말을 아꼈다. 향수와 이동원에 대한 지나씨의 각별한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무슨 열병(熱病.?)이 있었을 것으로만 추측했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접근해 봤다.
지나씨는 지금의 회사에 오기전에옥천의 한 업체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옥천은 곧 ‘향수’의 고향이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월세로 빌린 한옥에 살았다. 당시 어머니(72세)까지 스위스에서 모셔와 1년을 함께 지냈다. 스위스엔 어머니와 오빠, 올케 조카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지난 77년 부친이 돌아가신 날은 바로 인터뷰가 있던 10월 10일이었다. 지나씨의 한국인연은 우리나라에 온 91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삼성전자의 독일 프랑크프르트 지사에 근무한 것이 첫 인연이다. 그러다가 91년 말 한국 본사발령을 받았고 96년 퇴사했다. 지금 근무하는 세일하이텍엔 주변의 소개로 99년 11월 입사했다. 96년 삼성을 나오게 된 것은 한국어에 대한 배움의 욕구 때문.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서 오전에 랭귀지 코스 대학을 다닌 후 오후에 근무하겠다는 뜻을 회사측에 밝혔는데 곤란하다는 반응이었다.
회사측의 얘기는 이미 삼성은 다국적 기업이기 때문에 영어만으로도 업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건 잘못된 판단이다. 당시 회사측에서 오히려 권장했어야 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모든 대학교육이 산학(産學) 유기체 개념에서 포괄적으로 이루어지는 스위스의 예를 들며 한국의 모순을 조목조목 따졌다. 생각의 틀은 역시 서양인들의 합리적 사고를 견지했다. 때문에 인터뷰 요청에도 처음엔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회사와 관련된 것이 아닌 개인적 문제를 사무실에서 논할 수 없다는 논리를 설득하느라 이 회사 대표도 애를 먹었다. 지나씨가 언론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어머니 모셔와 옥천서 1년 살아

지난 99년의 일이다. 당시 모 언론사가 연줄연줄로 지나씨를 소개하게 됐고, 기사가 나가자마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각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면서 회사의 업무까지 마비될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그녀를 향한 뭇 남성들의 구애까지 벌어진 것. “지금 생각하면 기억하기도 겁난다. 새벽 혹은 오밤중에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고맙지만 너무 하더라. 한국인들은 아직도 외국인들에 대해 지나친 반응(Reaction)을 보인다.” 지나씨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의 상황은 악몽(?)이었다. 때문에 기사를 쓰더라도 자신의 소재와 미혼이라는 사실은 절대 밝히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당시 지나씨에게 연어(戀語)를 보냈던 사람중엔 대학교수도 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그녀의 심성에 홀딱 반한 것이다.
지나씨의 직업관은 역시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다. “이 회사에 오기전만 해도 공업용접착 테이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세일하이텍은 첨단 기계용 접착테이프를 생산하는 국내 대표적인 업체다. 이 회사 박광민 사장은 정부로부터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컴퓨터 등 정밀 기계에 이런 테이프가 들어간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인간을 위한 각종 이기(利器) 속에 우리 제품이 사용된다는 것자체가 나한텐 사명감을 준다. 인간을 위한 가장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지나씨는 은퇴후를 대비, 지금 두가지 꿈을 설계하고 있다. 공부를 더해 한국과 스위스를 잇는 외교역할을 하고 싶은게 첫째고, 보육원 출신 아동들에게 살집을 만들어 주는 것이 두번째 희망이다. “사정이 허락하면 그들과 한집에서 살고 싶다.”
지나씨는 조만간 한국으로 영구 귀화할 생각이다. 요즘 한국의 역사공부에 심혈을 다하고 있다.
/한덕현기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충북“ 한국의 술문화 이거 너무 해요”
지나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두가지다. 러브호텔과 술집이다. 청주, 충북에 대해 느끼는 대표적 인상을 말해달라는 주문에 그녀는 대뜸 러브호텔을 거론했다. “청주에 가장 부끄러운(Shame) 것이 하나 있다. 러브호텔이다. 전국에서도 제일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스위스에도 이런 문화는 있다. 그렇지만 그곳은 특정 지역에 단지화됐다. 필요한 사람과 필요치 않은 사람들을 분명히 구별한다. 하지만 이곳의 사정은 어떤가. 천지 사방이 러브호텔 아니면 여관이다. 내가 감명을 받은 한국의 역사가 안스럽다.” 이렇게 말하는 지나씨에게 한국의 뒷문화에 대해 한가지 더 물었다. “술집은 어떤가.” 이 질문에 그녀는 인상부터 찡그리며 거침없는 말을 쏟아 냈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느낌이 안좋다. 술집에서 한국 남자들이 여 종사원들과 노는 것, 도저히 이해 못한다. 마치 옛날 사또가 기방에서 기생들을 희롱하는 것같다. 그 여자들이 본인들의 부인이고 딸이라고 생각해 봐라. 아마 엄청나게 화날 것이다.(지나씨는 이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한국 사람들의 술버릇도 문제다. 적당히 두세잔 마시면 좋을텐데 머리에 오를때까지 기를 쓰고 마신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배석자가 거들었다. “서로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그것도 한국적 특성이다.” 그러자 지나씨의 얼굴이 더욱 상기됐다. “말도 안 된다. 그건 애정이 아니다. 여자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가. 잘못됐다.”
그녀가 옥천에 살 때 있었던 해프닝은 아직도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는다. 무슨 행사가 있었고 지역 기관장이 낀 회식자리가 마련됐다. 기관장으로부터 자신에게 술잔이 권해지자 “나는 안 마신다”고 딱 잘라 말한 것이다. 그 뒤의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한 것. 그야말로 회식자리가 썰렁했던 기억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지나씨가 생각하는 한국의 주법(酒法)은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잔을 받았다가는 좌중의 모든 사람들한테도 공격(?)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각인돼 있다. 그래서 한국생활 10년째인 지금도 이것이 부담스럽다. 지나씨의 가장 좋은 한국 먹거리는 인삼이다. “독일에 있을 때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수술이 끝난 후 한국의 인삼차를 뜨거운 물에 타서 마셨다. 그랬더니 힘을 너무 빨리 받았다.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인삼이 좋다는 것을 잘 안다.”
한국사람, 한국남자들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마지막으로 물었더니 예의 범상치 않은 수사(修辭)가 나왔다. “비교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계 모든 나라가 똑같다. 인간은 인간, 부모는 부모, 아이는 아이, 궁극적으론 차이가 없다. 천사가 있으면 도둑도 있고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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