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산단만 15% 넘는 30 여개 업체 ‘보따리’
“이러다 껍데기만 남을라…” 위기감 고조

“한국에서 사업을 계속해야 하는가.” “차라리 이 기회에 해외로 나가자.”
생산성을 앞지르는 임금상승률과 불안한 노사관계, 여기에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기업 정서, 게다가 경제문제는 도외시한 채 예측 불가능하게 돌아가는 정치권의 동향 등 기업들의 경영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는 요인들이 업체, 특히 기업의 꽃이라는 제조업체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국내 생산 여건이 악화되면서 도내의 많은 제조업체들이 잇따라 중국과 동남아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는 현상이 몇 년 전부터 두드러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의 해외탈출 러시가 감당할 수 없는 단계로까지 확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경고음이 결코 과장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역 경제의 공동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72년에 가동을 시작한 청주산업단지 내 대표적 섬유업체인 (주)대원은 그동안 꾸준히 펴 온 지역밀착 경영으로 ‘사실상 향토기업’이라는 명예스러운 호칭까지 받은 중견 업체다. 더구나 이 회사는 청주산업단지 관리공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전영우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기업체여서 지역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은 다른 기업보다 크다.

대원, 생산시설 베트남으로 이전
그런데 최근 대원의 청주공장 방적시설이 절반 가량이나 줄어들었다. 국내 생산 여건이 악화되면서 가동 30년 만인 지난해부터 생산라인 절반 가량을 베트남으로 옮기고 있다. 더구나 대원은 나머지 생산 시설도 점차 베트남으로 옮겨갈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주)대원은 ‘건설’ 부문만 충북에 남게 된다. 이 회사 이해성 상무는 “베트남 이전은 가격 경쟁력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첨단산업 업체들의 이전도 빨라지고 있다. TV와 모니터 부품을 생산하는 자화전자는 다른 기업에 비해 상당히 앞선 시점에 해외로 나간, 일종의 원조업체라고 할 수 있다. 96년부터 중국 천진에 종업원 1800명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자화전자의 박상범 총무팀장은 “우리의 주요 고객인 대기업들이 해외로 이전을 하면서 우리 역시 물류비용 절감과 노동생산성 향상 등 차원에서 함께 이전을 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됐다”며 “세계공장의 집합소인 중국에 진출한 것은 큰 물고기를 잡으려고 큰 물에 뛰어든 것으로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설명했다.

지역의 대표적 벤처기업으로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월드텔레콤의 홍용성 회장은 두달째 국내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고기술 제품인 레이저 픽업 헤드를 생산, 삼성전기 등에 납품하거나 일본 대만 중국 등지로 수출하고 있는 이 회사는 몇 년 전부터 중국과 필리핀에 현지공장을 설립, 해외조업에 주력하고 있다. 홍 회장은 바로 이들 국외 공장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현지경영을 강화하느라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홍 회장은 현재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그는 한때 청주공장 본사의 노사갈등 사태로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금융권이 대출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신용경색을 풀기 위해 한때 국내에서 동분서주, 어느 정도 급한 불을 끄게 되자 다시 중국과 필리핀 공장의 경영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것.

자화전자·월드텔레콤 등 첨단업체도 ‘탈출’
이 때문에 회사측에서는 “청주 본사를 이전할 계획은 없다”고 확언하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노동생산성 등에서 한계에 부닥친 월드텔레콤이 종국에는 해외로 완전히 이전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30년간 청주산업단지를 보금자리 삼아 기업활동을 해 온 삼화전기의 최근 움직임은 더욱 충격적이다. 삼화전기는 최근 들어 ‘국내공장 폐쇄-중국 이전’을 결정, 이를 노동조합 측에 공문으로 통보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삼화전기는 10월 노조에 “청주산업단지 공장과 충주 목행동 공업단지내 공장을 폐쇄하고 중국 천진 현지공장의 운영에 전념하겠다”는 방침을 구두로 통보한 데 이어 지난 11월 10일 이 결정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삼화전기는 국내공장 폐쇄 시점을 내년 1월 11일로 특정했다.
삼화전기가 이처럼 국내공장의 폐쇄를 결정한 데에는 임금 경쟁력 하락 등 국내 경영환경 악화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같은 회사측 방침에 대해 노조에서는 큰 충격과 함께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노조설립 이후 13년 동안 무분규 사업장을 기록할 정도로 대표적인 노사협력 사업장인데다 지난 4년간은 임금문제 등을 회사측에 일임하는 등 전폭적으로 협조해 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노조로서는 이번 주로 잡힌 노사협의회에서 최종 담판을 지어야 할 형편이다.

삼화전기도 ‘중국행’…1300명 일자리 걸려
삼화전기는 청주와 충주공장에 870여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6개 협력사 직원 500여명까지 포함하면 1300여명이 이 회사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어 공장폐쇄가 확정될 경우 큰 파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컨덴서를 전문으로 생산해 삼성 등 대기업 납품과 해외 수출에 나서고 있는 삼화전기는 저임금을 무기로 추격하고 있는 후발국가들의 가격공세에 밀려 매출급감을 겪고 있으며, 올해 15억원 가량의 적자를 예상하고 있다.

삼화전기는 “회사가 어렵다는 사실을 노사 모두 잘 알고 있으며 이에따라 구조조정과 임금 동결 등 자구안에 대해 노조에서도 전폭적으로 협조해 왔지만 더 이상 악화되는 기업환경을 극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다다르게 됐다는 데 근본적인 고민을 갖고 있다”며 “더구나 지난해 노사협의 때 구조조정을 통해 올해 80억원대의 흑자를 기록하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적자를 보게 돼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측은 “손해나는 기업을 언제까지 갖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도 했다.
삼화전기는 청주공장의 생산라인을 중국 천진으로 옮기고 청주에는 중요 영업및 신제품 연구 기능을 존속시키는 방안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올해 15억원의 예상 적자 중 10억원이나 차지한 충주는 완전히 폐쇄하는 것으로 내부 결정을 내린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화전기는 “노사 모두가 각기 경영개선 계획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며 “노조와 최종협의 절차를 남겨놓고 있는 상태인 청주공장의 생산시설 철수가 100% 확정된 것은 아니다”고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이 회사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최종적으로 도출될 회생방안 역시 뾰족한 내용은 없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청주산단 공동화 우려감 증폭
이처럼 최근 몇 년새 생산시설을 중국과 동남아 등지로 옮겼거나 해외이전을 모색하고 있는 업체는 청주산업단지에서만 30여 개 업체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청주산업단지 관리공단 김윤회 팀장은 “20 여개 업체는 이미 생산시설을 중국과 동남아 등지로 옮겼으며 10 여개 업체는 현재 이전중이거나 추진하고 있는 상태”라며 “이는 청주산단내 200여개 입주업체 중 15%에 이르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해외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기업들은 그나마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사정이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한다는 ‘역설적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들보다 자금력이 약한 소기업들은 경영의욕이 꺾인 지 오래며, 나아가 임금이 싸고 노사갈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중국 등지로 해외이전을 하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어 진퇴양난에 빠진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해외로 나가고 싶어도 소기업들은 엄청난 비용과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새 환경 때문에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업계 말이다.

실제 중견업체들이 빠져나가면서 도내 제조업의 위축 현상 가속화는 물론 산업단지의 공동화 및 고용시장의 불안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소규모 기업에게는 악몽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동차 회사에 전기배선을 생산·납품하는 청주산업단지내 모 업체가 좋은 사례다. 한 때 직원이 120명에 달할 정도로 잘 나가던 이 기업은 경기도에 있던 원청 업체 두 곳이 생산시설을 중국으로 옮기면서부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원청업체를 따라 가고 싶어도 그럴 형편도 못되기 때문이다. 현재 대기업 한 곳에만 납품하고 있는 이 업체는 “한마디로 죽을 맛”이라고 했다.

“그나마 외국 나가는 업체는 나은 편”
“유일한 매출처인 대기업에서 노사분규라도 발생, 파업에 들어가면 속수무책입니다. 당장 주문이 끊겨버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기업이 종업원에 대한 임금을 대폭 올려주기라도 하면 막바로 그 여파가 하청업체에게 밀어닥칩니다. 임금 인상분을 납품단가 인하 등으로 흡수하기 위해 하청업체들을 옥죄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요구를 거절하면 결과는 뻔합니다. 말 안 들으면 그날로 오더(주문)가 끊어져 버립니다. 최저임금법도 문제입니다. 소기업의 현장 상황과는 거리가 먼 최저임금제가 매년 시행되다보니 돈벌이는 시원찮은 데 종업원들의 임금은 자동적으로 올려줘야 하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문 닫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렇다고 배운 게 이것밖에 없으니 작파할 수도 없고…”

청주산업단지 관리공단은 “지역의 중·대형 기업들이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겨가면서 이들 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던 하청업체들이 말못할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며 “생산 시설을 함께 옮길 수 없다보니 문을 닫는 일부 하청업체들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경제계는 “업체들의 해외이전이 지역의 산업생산 기반을 무너뜨려 노동시장의 ‘파이’를 줄이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고용불안이 소비위축과 경기침체를 낳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기업들의 해외이전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대응책 마련을 위한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충북 경제, 특히 청주·청원권을 중심으로 한 지역 경제는 몇 년째 생사기로에 빠져있는 대농과 하이닉스, 그리고 월드텔레콤 등 해외로 탈출구를 돌리고 있는 잇딴 기업들의 이탈로 점점 ‘추진력’을 잃으며 식어가고 있다.

북 개성공단 제2의 기업 블랙홀 될라

청주산단의 8배 규모…싼 임금 등 유인력 대단1000만평 규모로 조성중인 ‘개성공단’이 중국에 이어 국내 제조업체들을 흡수하는 거대한 제2의 ‘블랙홀’로 떠오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섞인 분석이 나오고 있다. 124만평에 달하는 청주산단에 비해 8배 이상 큰 규모의 개성공단은 땅값이 평당 18만원 정도인데다 임금도 7만 9000원(75달러 안팎)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한국정부가 ‘북한 현지에서 조업 중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남북교류협력기금에서 대리 보상키로 결정함으로써 기업들의 북한행에 또 하나의 안전판을 마련해 관심을 끌고 있다.

청주산단 관리공단은 “세금우대 혜택도 주어질 것으로 보여 국내의 노동집약적 사업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개성공단이 각광받을 것”이라며 “이로 인해 가속화할 국내 제조업체 공동화 현상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청주산단 관리공단 김윤회 팀장은 “아직은 남북한간 육로운송이 결정되지 않아 물류비용이 만만찮고 또 전력공급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인가도 미정인 등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이런 난점들이 해결되면 당장 저임금과 무노조 환경 등 개성공단이 갖고 있는 매력이 엄청나 청주산단 등 국내 산업집적지들로선 무시못할 경쟁자로 떠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청주 산업단지 기업 외국 진출 현황>
▶중국=삼화전기 LG산전, 한국네슬레, 오리온, 다이아몬드치재, 월드텔레콤, 자화전자,
조광피혁, 서진전자공업, 맥슨텔레콤, 에이치앤티, LG생활건강, LG화학, LG전자
▶필리핀=월드텔레콤
인도네시아=맥슨텔레콤, 동일방직, LG화학, 한국도자기
▶태국=맥슨 텔레콤
▶베트남=대원, LG산전, LG화학, 오리온
▶말레이시아=삼영화학공업
▶이집트=동일방직
▶미국=하이닉스반도체, LG전자 (이상 27개 업체·중복기업 포함)
(자료제공; 청주산업단지 관리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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