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로 대농 노동조합 위원장의 격정 토로

80년대만 해도 실 뽑는 기계가 35만 추(錘)에 이를 정도로 동양최대 방적회사로서 위용을 잃지 않았던 대농. 그러나 지금은 6400억원의 부채를 짊어지고 부도 끝에 법정의 관리를 받는 몰락한 왕국. 이 과정에서 끝없는 구조조정으로 한때 8000명에 달했던 종업원이 1000여명 수준으로 급감한 대농.

대농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연맹 소속)을 4년째 이끌고 있는 윤광로 위원장(53)은 그의 33년여에 걸친 ‘대농인’ 인생의 역정에서 요즘처럼 진한 회한과 갖은 상념에 젖은 적이 없다. “지난 1년여 동안 공장이전 후보지를 물색하느라 청주 청원은 물론 인근 지역을 다녀본 곳이 무려 수십 군데나 됩니다.”

“땅 찾아 안가본데 없어”
윤 위원장은 “법정관리를 받는 처지가 돼 보니 기업에 주인이 없어지고 중심이 흐트러지는 상황을 생생히 목격하게 됐다”며 “따라서 이같은 위기상황에서 회사의 주인이자 구심체로 나설 수 있는 건 노조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건 당연한 귀결”이라는 말도 했다.

70년 11월에 입사한 이래 만 33년을 한 직장에서 봉직, 대농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윤 위원장은 “공장이전부지 확보문제와 관련해 전폭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은 청주시와 충북도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며 “대농이 지금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기까지 앞으로 더 큰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기자를 보고 “(대농이) 완전히 잊혀진 존재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찾아 줘 고맙다”는 말도 여러 차례나 했다.

“주위의 무관심이 너무 슬퍼”
그만큼 그로선 지난 세월이 간단치 않은 듯 했다.
“인구가 14만∼15만 명에 불과했던 70년대 초만 해도 청주시에는 기업다운 기업이 없었습니다. 제조창과 대농 정도였지요. 특히 대농은 최전성기 때 종업원이 8700명이나 됐어요. 이들을 위한 식사만 하루에 1만 5000끼가 제공됐어요. 말 그대로 대농은 청주지역 최대의 성장엔진이었습니다. 존경도 많이 받았죠.”

윤 위원장은 “하지만 인력집약적인 방적업의 한계를 읽지 못한 오너의 경영실책과 방만한 운영으로 90년대 들어 끝내 대농이 침몰하는 영욕까지 맛보게 되니 느낌이 남다르다”며 “요즘 들어 아무도 대농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지역의 정서에 직원들이 소외감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70년대 10대 재벌이었다가 80년대 100대 기업, 90년대 1000대 기업으로 거푸 위상추락을 겪은 끝에 법정관리를 받는 운명으로까지 떨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때 10대기업이었는데…”
“심지어는 대농이 망한 회사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서운함을 내비친 그는 “기아나 한보철강처럼 우리는 단 한푼의 공적자금 지원도 받지 않고 지난 5년간 법정관리 속에서 그야말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감내하며 회사를 지켜왔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 위원장에 당선된 이후 올해로 만 4년째 대농의 노동조합을 이끌고 있는 윤 위원장은 아픈 과거를 더듬어 냈다. “회사회생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게 됐을 때였습니다. 모두 한 가족인데...누구는 내보내고 누구는 안 내보내고 하는 결정을 앞두고 엄청난 고민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대농을 위해 6000억원대 이상의 거금을 쏟아부은 채권단을 생각하면 우리의 이해만 앞세워 구조조정을 반대만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와 함께 노조를 이끌던 노조 부위원장 등 7명의 간부들이 십자가를 짊어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분들의 이런 자기 희생이 없었으면 법정관리 후 3차에 걸쳐 이뤄진 구조조정을 통해 총 2700명을 감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동료들의 희생 잊을수 없어”
“명퇴위로금도 주지 못한채 숱한 동료들을 떠나 보낼 때 노조 위원장이 된 것을 후회했다”는 윤 위원장은 “동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방향타를 잃은 회사를 노조가 앞장서 반드시 되살려 내겠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대농의 인수합병 주체로 등장한 신안컨소시움에 대해 그들의 경영철학 등에 대해 아직 판단이 안선다”며 “하지만 우리가 주인의식을 지켜나가고 지역사회도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신다면 대농을 지키는 일이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지속적인 도움을 재차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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