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CJB 청주방송 PD

어느 인터넷 신문 기획 기사에 눈길이 멎었다. ‘어떻게 피운 꽃인데…겨울로 돌아가나’.

‘민주주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가?로 질문하며 시작한 글은 우리 사회가 다시 겨울공화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결론짓는다. 서슬퍼렇던 유신 시절, 말과 글을 삼가던 당시의 시대적 아픔의 한 표상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양성우시인의 ‘겨울공화국’이 왜 뜬금없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다시 ‘겨울공화국’을 맞고 있는가.

지난 1년여의 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살아온 우리 사회의 궤적을 살폈을 때 어떤 것들이 나아졌을까. 살림살이? ‘747 공약’은 조용히 사라졌고 중산층은 무너져 신빈곤층이 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우리는 괜찮지만 미네르바는 구속되었다. 지역발전? 김문수 경기지사가 세종시를 ‘불행도시’라고 조롱했고 기업들은 수도권으로 유턴했다.

언론? YTN 노종면기자가 구속됐고, PD수첩에 대한 수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세금? 종합부동산세가 무력화돼 세금이 줄게됐고 양도소득세도 인하될 것 같다. 사회복지? 1년 전보다 비즈니스 수익 모델이 많아져 달려드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전인교육? 학생들은 더 치열한 경쟁속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일제고사를 치르게 됐다. 사교육? 몇 안되는 유망 업종이다. 갈수록 자본과 인력이 몰리고 있다.

‘겨울공화국’을 언급한 기자는 지난 1년여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가 우리 스스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할 만큼 충격적인 속도로 다시 ‘겨울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 선거에 의하여 일정한 임기를 가진 국가원수를 뽑는 국가형태’가 바로 ‘공화국’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겨울공화국이 새삼 언급되고 있는가.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은 유신 폭압 정치 시절, 교직에 있던 시인이 시를 낭독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직에서 파면되게 만든 시이다. 한마디로 지금 세상과 비교할 때 시대 착오적인 시이며 시대 모욕적인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런던타임스>의 조롱섞인 염려를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을 향한 이런 종류의 ‘염려’하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공화국이되 공화국이지 않은 1970년대를 노래한 표현 ‘겨울공화국’이 한 사람, 두 사람, 사람들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제위기를 구실삼은 구조조정의 위기에 놓인 직장인들은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해왔던 그 시절의 CEO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그런 CEO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터넷을 통제하며 검열이 일상화된 중국의 무지몽매함을 비웃던 네티즌들은 중국 네티즌 앞에서 무게잡기 어려워졌다. 한류를 이끌었던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한 창의성은 국제중, 일제고사의 등장과 함께 다시 시곗바늘처럼 빈틈없는 돌아가는 하루에 녹아 사라지고 있다.

1975년 양성우시인이 ‘겨울공화국’이란 시를 낭독해 교직에서 파면되고, 1977년 시 ‘노예수첩’으로 인해 구속되었다면 미네르바는 경제이야기로 구속돼 현대판 필화사건의 기록을 남겼다. 이런 현실이 장삼이사가 겨울공화국을 말하게 만들고 있는 것같다.

시인은 시대의 심장을 건드린다. 아무리 건강한 심장이라 해도 시인의 눈에는 병든 구석이 보인다. 따뜻한 봄날을 고대하며 긴 겨울을 보내고 있는 공화국 시민들에게 ‘겨울공화국’은 형벌이다. 또다른 양성우가 ‘겨울공화국’을 읊조리는 일이 없도록 어느 시골에 봄꽃이 피는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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