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태 익 (충북보건환경연구원 총무과장)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 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아마 이 동요를 모르는 어른들은 별로 없으리라. 세태가 달라져 이젠 팝이나 대중가요를 선호하는 아이들이 이 동요를 열심히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아무리 노래한들 그 대답은 아나 콩이 된 지 오래다.

사람과 제일 친한 새, 제비! 인간을 너무 믿어 처마밑이건 보꾹이건 가리지 않고 둥지를 틀어 지지배배 지지배배 노래하던 새! 주둥이 노오란 새끼들이 입을 짝짝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조르던 귀염둥이들! 제비는 「흥부전」의 권선징악을 일깨워주던 새여서 사람들이 환경을 오염시켰어도 인간을 원망할 것 같지도 않은 새였다. 제비에게 도덕적인 의미를 얹은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 뿐일 것이다. 그러기에 보은(報恩)의 화신으로 판소리 「흥보갯가 지금도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또한 제비는 수절이의 이미지가 강한 새라한다. 수컷을 잃은 암제비는 이듬해면 어김없이 돌아온다는데, 글쎄 공해 때문에 남편을 잃었으므로 노골적으로 공해를 원망하면서 홧김에 서방질 한다고 개가할 법도 한데... 나는 조류학자가 아니어서 그것은 잘 모르겠다.

어질디 어진 새, 제비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꼭 공해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땅의 온갖 패륜과 이혼율, 비리와 악행에 놀란 나머지 오다가도 되돌아 갔는지 모른다. 아니 제비도 이젠 정신건강을 해쳐 인간혐오증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윤재근 교수는 우화집 「톡톡탁탁」을 통하여 풍자침을 놓고 있다. 집제비가 들제비를 만나 전세방을 얻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들제비가 왜 사람의 집 처마 밑에 살 수 없게 됐느냐고 물었다. 성적을 비관한 그 집의 꼬마 아이가 투신 자살을 했는데 새끼들이 본뜰까 봐 사람의 집에서 살기가 무섭다고 집제비가 조아렸다. 이 꼴을 본 학이 중얼거렸다.

제비가 무서워한 게 어디 ‘꼬마의 투신자살’ 뿐이겠는가. 카드빚 때문에 어미가 자식과 함께 15층 아파트 배란다에서 투신하고 용돈 안 준다고 부모님을 무참히 살해하고 노부모님께 불효하고서도 그 동안 봉양한 대가를 받으려고 억지를 부리는가 하면 부자간에 송사질하고 수백억원을 꿀꺽 하고도 뻔뻔스레 검찰청사를 드나드는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 인사 등 인두겁 쓴 인간들에게 수없이 질리기도 질렸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새들이 어디 제비뿐이랴! 물총새, 종달새, 두루미, 백로, 물오리, 가마우지... 그 중에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전선줄에 앉아 강남으로 떠날 회의를 하던 제비야, 돌아오너라! 연작(燕雀)은 대붕의 뜻을 모르고 6척의 인간은 제비의 마음을 모른다. 머지 않아 한가위다. 대보름달을 쳐다보며 곰곰 되새기자. 우리가 진정으로 잘 산다는 것은 온갖 생명체들과 공존하는 것임을. 제비야, 돌아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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