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조문행렬이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종교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전 국민적인 애도와 추모의 모습에서 나름대로 다양한 분석을 하기도 합니다만, 이 시대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의 부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압도적 차이로 선출된 지도자에 대한 실망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이고, 여당이건 야당이건 기대해 볼만한 지도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절에 참으로 불행한 일이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을 떠올리며 언제쯤 우리에게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돈 많은 부자, 싸움 잘하는 장군, 말을 잘하는 정치인, 글을 잘 쓰는 시인이 넘쳐나지만 모두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고사하고 1962년 동인문학상을 받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외과의사 이인국 박사처럼 지조나 신념 따윈 아랑곳없이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해가는 기회주의자만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일제식민지치하에서부터 광복 후 소련과 미군 점령하의 시대를 배경으로 출세와 영달에 눈 먼 기회주의자의 행각을 통해 한국사회의 지도층을 통렬하게 비판한 이 작품이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어 오늘과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오늘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예의로라도 축하와 기대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명박하다'는 어휘를 다 찾아내 입에 올리겠습니까. 운명이나 팔자가 기구하고 복이 없다며 자조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희망을 노래하기가 버겁습니다.

이명박 정부 1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경제는 죽여도 좋으니 국토나 죽이지 말라"는 간절한 소망이, "정치는 죽일지라도 언론은 죽이지 말라"는 처절한 절규가 '경제살리기' 기대를 대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침체된 경제는 다시 살릴 수 있지만 한번 파괴된 산하는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며,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경제를 빌미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는 잘못된 정책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지난 수십년에 걸쳐 피로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신공안독재로 회귀하는 것은 엄청난 국민적 저항을 다시금 불러 올 것입니다. 또한 수만년 이어오고 이어 갈 우리 강산을 국토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난도질칠 권한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정부수립이래 일관되게 펼쳐온 수도권과밀억제, 균형발전정책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고 무한경쟁으로 내몰아가는 그 끝은 어디입니까. 소위 '엠비(MB)악법'이 초래할 가공한 결과와 그로써 빚어질 소모적 갈등과 국가적 손실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막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 1년에 즈음하여 낯간지러운 자화자찬보다는 최소한 앞으로 4년의 성공을 위하여서라도 정책기조의 일대전환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꺼삐딴 리'와 같은 기회주의자나 곡학아세도 마다않는 사이비를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4년이 다 가기 전에 혜성처럼 나타날 큰 바위 얼굴을 기대해 봅니다. 아직은 4년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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