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미내다리, 三南 제일의 대교 명성 뒤에 구렁이 된 청년의 전설은 도도히…

강경미내다리는 조선시대 三南의 제일의 대교로 꼽혔다. 축조와 관련된 ‘구렁이가 된 청년’전설은 권선징악의 사회상을 담고 있다고 할수 있다.

조선시대 삼남제일의 대교

계룡산과 대둔산의 품에 안겨 넓은 들을 가지고 있는 충남 논산. 백제 계백의 혼이 황산벌을 달리고 선비 정신이 도도히 흐르는 충절과 예절의 고장으로 꼽힌다.
호남과 서울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명성을 간직하고도 있다. 그 중 강경 지역은 강경천을 이용한 수로 교역으로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던 곳이다.
이곳 강경에서 채운면 삼거리 사포 방면으로 1㎞쯤 올라가다 보면 3개의 아치형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조선시대에 서울서 호남지역으로 들어가는 다리로서 이름이 높았던 미내다리(渼奈橋)다.
강경천의 왼편 뚝을 따라 1km 쯤가면 제방안쪽으로 다리가 나타난다. 이 하천을 미내라고 부른데서 연유하여 미내다리라고도 하고, 조암교라고도 하는데 길이 30m, 다리 넓이 2.8m에 3개의 홍예로된 다리이다. 지금은 고속도로와 가로놓인 철도로 쓸모없이 되어 버린 돌 다리이지만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이 다리는 당시 3남 제일의 대교였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조선조 영조7년(1731) 강경사람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사람 유부업, 중경원 설우 청원 3인과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재물을 모아 1년만에 축조했다고 한다.

다리의 구조는 3개의 홍예로써 가운데 부분이 제일높고 크며 양쪽 홍예는 조금 작고 낮은 전형적인 홍예교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받침은 긴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돌려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40cm× 50cm×110cm 내외의 장대석이다.
가운데 홍예의 정상부 종석은 다리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호랑이 머리를 조각했고, 북쪽의 홍예정상부 종석 다리난간 돌에는 용머리를 새겼으며, 난간석에는 화문을 새긴 듯하나 지금은 마멸되어 식별하기 어렵다.
남쪽의 홍예 정상부에는 조각이 없다 홍예와 홍예사이의 간지에는 양쪽 보이는 면으로 35cm×150cm 정도의 장대석으로 잘 조화시켜 쌓았으며 다리 윗면에는 턱진 장대석을 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턱에 보도와의 경계석을 끼우도록 하였다.
미내교옆의 자연석위에 은진미내교비가 있었으나 파손되었던 것을 찾아내어 지금은 국립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슬픈 전설만이 옛 영화 지켜

축조 연대와 축조자의 이름이 비문에 새겨져 있지만 이 다리를 두고 전해지는 슬픈 전설은 그 나름의 역사로 드러나고 있다.
당시 이곳은 큰 냇가로서 바다와 통하여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만 했는데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해 마을에서 두 청년에게 다리 공사를 맡기고 집집마다 돈을 거두어 자금을 마련했다. 두 청년은 다리를 놓고 남은 돈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돈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자니 액수가 너무 적었고 둘이서 갖는 다는 것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다리가 부서지면 보수하기로 하는데 쓰기로 하고 아무도 모르게 다리 근처에 돈을 묻게 되었다. 그 뒤 여러 해가 지나도 다리는 튼튼했으므로 두 청년은 훌륭한 기술자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다리를 놓았던 한 청년이 갑자기 병을 앓게 되었다. 소문을 들은 다른 청년이 가난한 친구를 우선 살려 놓고 보자는 생각으로 다리 밑에 묻어 두었던 돈을 생각하고 다리밑의 땅을 파보았지만 돈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청년은 병든 친구가 자기 몰래 돈을 꺼내갔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른체 하고 친구의 병이 완쾌 되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청년의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더니 어느날 저녁 큰 구렁이로 변해 버렸다.
그 집 식구들은 울고 불고 야단 법석이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마침내 그 구렁이는 스스로 집을 나와 미내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가끔씩 다리 근처에 나와 눈물을 지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 구렁이를 동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친구 몰래 다리 밑의 돈을 훔쳤다고 침을 뱉으며 구렁이를 욕했다.
구렁이는 비내리는 날이면 엉엉 울기도 해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없애고자 했다. 그 뒤 다리는 점점 메워져 갔고 다리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차츰 뜸해져 쓸모 없는 다리가 됐다.
그리하여 구렁이가 된 청년은 그 돈을 도둑질한 죄 값으로 벌을 받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구렁이를 나쁜 용으로 만들어 하늘로 오르게 하다가 다시 땅에 떨어뜨려 죽게 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용당골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그런 이후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다시 즐겨 찾았고 그 곳에 찾아와 소원 성취를 빌기도 했다.

또 세월은 흘러갔고 마을에 사는 농부 한 사람이 큰 돌이 필요해서 이 다리에서 돌을 빼는데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천둥이 치고 검은 구름이 농부의 집을 에워싸면서 집을 날려 버릴 것 처럼 기승을 부렸다. 겁이 난 농부는 급히 돌을 다시 미내다리에 갖다 놓았더니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게 개였고 그 뒤 다시는 이 돌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다리의 중요성과 공공재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인식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이를 만나러 갈 때 이 다리를 건넜다는 것도 서울에서 전라도로 가고 올 때 지나야 할 다리였다고 하며 춘향가중 암행어사 대목에 ‘한양성 이도령이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 명을 받고 전라도로 향할 적에 이도령이 지나가는 길목에 은진 까치다리 향화정이 나오니 그 사이에 있는 미내다리 위를 지나갔음은 더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미내다리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 달이 뜰 때 자기 나이 만큼씩 다리를 왕래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액운을 면한다고 하여 이 다리를 오가는 풍습이 생겨나고 부터다.
아기를 못 낳은 아낙네는 아기를 낳을 수 있고 남편이나 자식의 소식을 몰라 애태우는 여인은 소식을 들을 수 있는가 하면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소원 성취는 물론 일년 내내 다리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수 있다고 하여 청춘 남녀들이 밤 늦도록 미내다리를 밟고 왕래했다고 전해져 온다.
교량은 이렇듯 인연과 사랑의 가교로 그려지고 있다. 어찌되었든 미내다리는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지나갔고, 유배를 당해 떠나는 선비 또한 이 다리를 건넜을 것이니 묵묵히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손광섭 청주건설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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