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표 사회문화부장

회향(回向)은 불교용어다. 자신이 쌓은 좋은 인연이나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 나와 남이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타(利他)의 정신을 담고 있는 단어다. 불교로 볼 때는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 열매가 꼭 깨달음이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더욱 다양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의 목수인생 반세기를 아낌없이 회향하려는 사내가 있었다. 1957년 17살의 나이로 목수의 길에 들어서 1970년 불국사를 대대적으로 복원하는 공사에서 부편수라는 중책을 맡았으며, 1975년 수원성을 복원공사에서는 당당하게 도편수의 자리에 오른 청원군 오창면 출신의 신응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1991년부터 시작돼 오직 그의 손끝에 달려있는 경복궁 복원의 대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세상은 그에게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선사했다.

신 대목장은 여전히 현역에서 잘 나가는 목수지만 벌써부터 아름다운 회향을 준비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미 자신의 사재 200억원을 털어 전통건축박물관을 짓겠다는 뜻을 세웠다. 이왕이면 고향 인근에 박물관을 지으려고 우암산, 부모산 등 산자락을 누비고 다녔다. 2006년 초엔 강원도 강릉시 경포대 인근이 유력한 대상지로 물색됐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주들이 땅값을 올려 강릉시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불과 6개월 뒤 정우택 충북지사 취임과 함께 밀레니엄타운 내 대중골프장 건설계획이 백지화되면서 ‘박물관을 청주에 유치하자’는 한 갈래 물줄기가 형성됐으나 밀레니엄타운의 주인인 충북도의 마음은 딴 데 있었다.

2007년 경기도 부천시가 최종입지가 되는가 싶었는데 2년 만에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사실 기자는 속으로는 ‘청주에 삼세번 기회가 왔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신 대목장과 통화를 해보니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발언의 요지는 “진작 개인적으로 부동산을 매입해 추진했으면 벌써 끝났을 일인데 자치단체와 협력해서 하려다 일이 틀어졌다. 이젠 나이도 들고 힘에 부친다. (부천 외에)다른 장소를 찾아보든지 그 마저 여의치 않으면 소장물품을 기존 박물관 등에 기증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공직사회를 향해서는 “공무원들은 하나 믿을 것도 없고 못 배운 게 한이다”라며 깊은 불신감을 나타냈다.

박물관 건립 자체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마당에 ‘고향’을 운운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것도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신 대목장은 “그때(2007년) 했으면 몰랐을까? 지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좋은 얘기를 전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며 말문을 닫았다. 대목장이 꿈꿨던 회향이 10년 만에 허사가 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비겔란 조각공원’이 있다. 1869년에 태어난 비겔란은 너무나 가난해 시가 제공한 토지 위에 40년 동안 인간의 탄생,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주제로 200여 점에 달하는 조각상을 만들어 기증하고 1946년 자신의 작품처럼 생을 마감했다.

이곳은 ‘누구든지 무료로 드나들 수 있게 해달라’는 비겔란의 유언에 따라 세계인의 공간이 됐다.
오슬로가 세계적인 문화도시가 된 것은 천재 조각가 비겔란 덕분이기도 하지만 시민과 당국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의 생각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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