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리였다. 시민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다음과 같은 말을 쏟아놓는 진눈깨비 몰아치는 겨울밤이었다. '괴산 인구가 용암동보다 작다.' 이런 말을 하게 된 경위가 효율성이라는 데 이르러 나는 무척 놀랐다. 이어 '증평이 더 크다'라는 등의 막걸리 장단과 같은 흰소리가 들렸을 때 과연 이분들이 시민운동을 할 자격이 있는가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자. 이것이 과연 이성적 판단을 하는 인간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할 소리인가 괴산보다 용암동이 크다는 것은 단순한 비교나 정책적 분석이 아니다. 그것은 괴산에 대한 비하이며, 괴산에 가서 살기보다는 청주 용암동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고, 괴산사람들은 별것 아니라는 의미를 넘어서, 괴산은 여러모로 나쁘거나 불리하다는 뜻까지 포함한다.

결국 그것은 용암동과 괴산의 맬더스적 수치비교를 통하여 인간을 계급화하고 약자를 정신과 감정으로 폭행하는 폭력이다. 바꾸어 생각해 보시라. 이 말을 듣는 괴산사람, 그리고 보은사람과 단양사람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맬더스주의라는 망령에 포획(捕獲)된 노예다. '사람이 많아야 무엇이라도 한다'라는 성장발전주의에 나포된 한국인들은 크고 강한 것을 위해서는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마음의 법이 되어 버려서 자동반사적으로 맬더스를 불러낸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필자 또한 청주에서 왔다고 하니까 '참 청주인구가 신림동 정도 되나요 신림동과 봉천동을 합치면 청주보다 크지 않을까요'와 같은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심성도 착하며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 담화는 착하다는 것이 옳은 것과는 다르고 머리가 좋다는 것이 진실하다는 것과 다르며 능력 있다는 것이 훌륭하다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영국의 사회학자 맬더스는 인구문제의 중요성을 이론화한 사람이다. 그는 인구는 기하급수로 늘어나기 때문에 산술급수로 늘어나는 식량을 자급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구를 억제하지 않으면 식량을 위한 생존전쟁이 벌어지는 한편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리라고 주장했다.

한편 맬더스의 학설은 맬더스주의(Malthusianism) 즉, 인구중심주의라는 또 다른 논리로 진화했다. 그러니까 맬더스주의는 인구수를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것을 측정하고 분류하는 방법을 말한다. 가령 충북 3%와 같은 담론이 바로 맬더스주의의 산물이다. 3%는 서열까지 포함하므로 가령 전국체전에서 충북이 3%에 해당하는 순위를 달성했는가라는 판정의 기준이기도 하다. 장관이나

고위공무원의 3%는 충북인이어야 한다는 등 무수히 많은 담론이 3%의 망령에 붙들렸다. '청주청원을 합치면 곧 백만에 육박하고 또 크고 강한 청주를 만들 수 있다'라는 논리 역시 맬더스가 가르친 것이다. 이제 맬더스는 학자가 아니라 법관으로 재판 권력자로 군림한다. 지식이 권력이고 학자가 판사인 이 세상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되는 광기의 세상이다.

똑똑하고 권력이 있으며 성장발전에 포획된 사람들은 맬더스의 법정에 가서 재판 받기를 좋아한다. 반면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맬더스의 법정을 거부한다. 이들은 인구가 많고 커야 좋다는 맬더스의 감옥을 탈주한 후, 인구가 적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성장발전이 최선이 아니고 작아도 좋다는 인간주의의 진지(陣地)를 구축했다.

그리고 진정한 인간해방의 깃발을 들었다. 크고 강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과학기술만이 능사가 아니며, 강자가 아닌 약자도 인간답게 살아야 하며, 자본주의식 발전이나 성장에는 문제가 많고, 현대적이고 세계적인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정의와 진리가 빛난다. 이러한 반증가능성이 있는 사회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사회일 것이다. 서울 강남에 사는 것이나, 청주 용암동에 사는 것이나, 미국 시카고에 사는 것이나, 단양 어상천에 사는 것이 모두 같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맬더스의 노예이고 이성적 폭력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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