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사래를 치면서 경실련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두영 처장이었다. 풍모부터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싫은 소리를 하지 않을 것 같은 이두영은 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서경석은 경실련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옥천출신 이두영은 경실련에 몸을 맨 이 시대의 시민운동가로 평판이 높다. 그런 그가 극구 부정하고 부인하는 서경석은 누구인가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9년으로 돌아간다. 당시 경실련 사무총장이었던 서경석은 부산에서 '토지공개념과 경제정의'라는 강연을 한 바 있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사개념보다는 공개념으로 한국의 토지를 개혁하고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적 소유를 절대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한국에서 토지의 공개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복부인, 투기꾼 등의 이름이 말해 주듯이 땅은 재산 증식의 수단이었고, 토지의 본질인 생산이나 생존은 그 다음이었다. 땅으로부터의 불노소득을 얻고 땅 때문에 졸부가 생기고 죽고 사는 것도 다반사였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서경석의 토지공개념 또는 토지공공성은 복음과 같은 신선함이 있었다. 토지공개념의 핵심은 토지가 상품이나 사적 소유의 대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가능한 대로 공공의 재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한국의 민주화이며 평등한 시민사회를 만드는 길이라고 서경석은 설교했던 것이다.

그런 서경석은 오래지 않아서 마음을 바꾸었다. 언제부터인가 자본과 권력의 전도사로 나선 그는 뛰어난 언변과 정연한 논리로 사람들을 계몽했다. 그 계몽 중의 하나가 수도권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도권의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성장발전주의 담론이다. 전도사 서경석은 단순한 계몽을 넘어서 자기 스스로를 행동대장으로 임명한 후 좌충우돌하면서 수도권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다. 이것이 20년 전의 서경석과 20년 후의 서경석이다.

두 인물의 생물학적 유전자는 다르지 않지만 정신과 감정은 확연히 다르고 사상과 태도 또한 격세지감을 넘어선다. 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표변할 수 있다는 것은 고래로부터 흔한 일이지만, 서경석의 경우는 특수한 바가 있고 그 폐해가 상당하므로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만하다. 현재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모순은 사실 수도권이라는 토지와 비수도권이라는 토지의 모순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바로 이 21세기적 토지모순의 해결이다.

지난주, 이두영은 '서경석씨가 요즈음 수도권 강화 운동을 한다는데 사실이냐, 그렇다면 경실련이 책임을 져라'라는 힐난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이두영은 손사래를 쳤던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국가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미명하에, 수도권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이다. 이 홍위병 부대의 중심에 서경석이 있다. 운하를 적극 찬성하던 서경석은 선진화시민행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수도권 규제개혁촉구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수도권 규제개혁 촉구대회'를 여는 등의 활동으로 홍위병 전도사 노릇을 수행하고 있다. 한걸음 나아가 서경석은 '수도권 규제완화 반대론자들은 지역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며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수도권과 지방의 관계에 대해 다시 틀을 짜야'한다고 주장했다.

서경석씨는 목사라는 이름을 걸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말고 솔직하게 권력의 하수인이라고 밝히고, 자본의 전도사 노릇이나 잘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서씨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힘센 양을 더 강하게 만들어 그 혜택을 약한 양들이 보리라는 해괴한 논법은 서경석식의 성경 해석이다. 힘있는 양들을 떠 살찌게 만들기 전에 약하고 병든 양을 돌보는 것이 목자의 일일진대, 수도권강화를 주장하거나 신행정도시의 용도가 변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에게는 대체 무슨 악령(惡靈)이 깃든 것인가! 이 시대의 변절자 서경석에게 회개와 반성이 있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