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검게 그을린 한 주검은 초등생 늦둥이 딸아이를 둔 50대.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 시장에서 바둥바둥 자그마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이글 이글 불타오르는 집채보다 더 큰 불길속에서, 난간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외치던 그 사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지 않는다. 옥수수는 '팝콘'의 주재료일 뿐이고, 감자를 구우면 '포테이토칩'이 될거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한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문제를 이해하기 어렵다.

해발 800가 넘는 강원도 화전촌 마을에서 6남매를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께 물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먹고 살았냐고'.

'뭘 먹긴, 옥수수, 감자 삶아서 비벼서 먹고 살았지'. 나는 재차 어머니께 물었다. '쌀은 안넣고'.

어머니는 다시 답한다. '야, 이놈아. 쌀이 어딨어. 그래도 나물 안넣고 해먹으면 부자라고 그랬어.'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특히나 국가공권력을 집행사시는 분들에게는 더더욱 어제 죽어간 철거민들이 단순하게 폭력행위자로만 비칠지 모른다.

죽어간 그들에게 그 건물이, 허접해보이는 그 시장통이 삶의 '생명줄'이 였다는건 보일 리가 없다.

'생존권' 이란건 처해본 사람만이 안다. 애면 글면 오늘 하루도 시장에서 바둥대는 일상이 그들에겐 '밥'이 되고 '옷'이 되고 '전기'가 되고 '물'이 됐다.

그러나 졸지에 재개발이란 명목하에 생존의 광장이 사라져 버렸다.

'밥'이 없어지고, '물'이 없어졌다. 살아갈 터전이 졸지에 사라진 그들은 고작, 대로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소리'치면 나아질줄 알았다.

'재개발 건물 옆에서 포창마자라도 할수 있는 권리'라도 확보될거란 영세자영업자들의 순진한 생각은, 가장 비극적으로 끝났다. 국화꽃 한송이 앞에서, '다음 세상엔 부디, 철거민으로 태어나지 마세요'라고 절규하는 또 다른 철거민의 눈물로 그 비극은 끝을 맺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법치'와 '속도전'을 강조하는 MB정부의 소신은 바뀌지 않았다.

어청수 경찰청장보다 더 강력하다는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이 차기총장이다.

발표가 되자마자 이례적으로 속도전이 전개됐고 철거민들의 생존권은 아랑곳 없이 작전은 전개됐다. 삼성건설이 시공하는 재개발의 권리 앞에서, '법치'와 '속도전'은 '영세자영업자들의 생존권'은 등치될 수가 없었다.

찌그러진 깡통이, 밥 동냥하는 사람들의 상징으로 그려진 시대가 있었다. 그렇다. 찌그러진 깡통이라고 함부로 차면 안된다. 어떤 사람에겐 '밥'이고 '하늘'이다.

도시서민, 빈민 생존권 무시하는 '일그러진 법치'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도 사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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