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선 단체장 시절 언론의 위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저의 경우 관선 단체장 시절 막바지에 기자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도 그 엄청난 ‘파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문 한 귀퉁이의 조그만 가십 기사에도 출입처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995년 6월 주민들의 손으로 도지사와 시장·군수를 선출하면서 이 같은 언론의 힘은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정부의 임명직 단체장 시절엔 언론의 사소한 지적에도 ‘전전긍긍’했지만 민선 단체장은 법으로 보장된 임기가 있기 때문에 언론과 당당히 맞선 것으로 보입니다.

첫 민선단체장 중 유봉렬 옥천군수는 자신의 딸을 공무원으로 채용한 것을 지방일간지들이 보도하자 기자실을 폐쇄하는 등 ‘언론과의 전쟁’을 벌인 군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유 군수가 기자실을 폐쇄하자 지방일간지 4곳 중 3곳이 연일 옥천군청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군청 공무원이 낮잠을 자는 것까지 대문짝만한 사진으로 보도할 정도로 그 공격의 강도는 거셌습니다.

결국 기자실은 다시 문을 열었고 지방일간지 역시 유 군수 딸에 대한 보도를 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됐습니다.

저의 경우 도청을 출입하다 1998년 4월 옥천군 주재기자로 발령받아 유 군수와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제가 옥천 주재기자로 가게 되자 주변 사람들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 군수의 경우 언론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단체장으로 각인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 군수는 첫날부터 저를 반갑게 맞아줬고 서울로 직장을 옮길 때까지 3년간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 군수 부인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국어선생이었던 유 군수의 부인은 매일 점심 식사를 굶고 그 돈으로 10여년간 어려운 형편의 제자들을 도왔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 기사를 쓰겠다고 하자 단호하게 거절했던 유 군수의 부인은 수 많은 선행으로 제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참 스승’이었습니다.

유 군수는 3선에 성공한 후 임기 막판에 금품 수수 의혹으로 곤혹을 치렀지만 적어도 제가 근무했던 시기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옥천 근무기간 중 그 곳으로 아예 이사를 갔기 때문에 각별한 애정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요즘 옥천군의 일부 단체들이 대전 편입 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청주 출신인 제가 속 상한 것은 그 고장에 대한 좋은 추억 때문인 것 같습니다. /HCN충북방송 보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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