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한 평 물려받지 못했어도 선대에 자부심”

청주의 명물인 가로수길 인근에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로 왜군에게 항복하지 않겠다며 저항하다 순절한 충렬공 송상현의 묘소와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의 소재지는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강촌. 수의동(守儀洞)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절개를 지킨 마을이라는 뜻이고, 강촌(綱寸)이란 이름 역시 충신, 열녀, 효자 등 삼강을 지킨 인물이 태어난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 송정섭 선생의 증손인 송해승(사진 왼쪽)씨와 고손인 송중화씨가 1907년 종2품 벼슬에 오른 송정섭 선생의 교지를 들고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청주시 사직동에 살고 있는 송정섭 선생의 증손 송해승씨는 “증조부가 종2품(가선대부) 벼슬을 지냈지만 땅 한 평 물려받은 것이 없다. 땅도 없고 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할아버지는 훈장 노릇을 하면서 곤궁하게 살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의 한약방에서 일했던 선친도 결국 고향을 지키기 위해 청주로 내려와야 했다”며 “그래도 꼿꼿하게 살아온 조상들이 훌륭하게 여겨지고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송씨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청주고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동양화학에서 근무하다 교직에 입문해 27년을 몸담았으며, 7년 전 명예 퇴직했다.

송씨는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가르치며 독립운동가 집안의 몰락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송씨는 “구한말에도 친일파나 개화파들은 자식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냈지만 수구파나 우국지사의 후손들은 신식공부를 하지 못해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며 “진학이나 취업, 결혼 등 모든 조건에서 뒤쳐지면서 결국 가계가 몰락하고 가난도 대물림되고 만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송 선생 역술가로 산 곤궁한 말년
이번 동학유족 등록 과정에서 부분적이나마 고조부의 삶의 궤적과 조우한 고손자 송중화씨는 1907년 관직을 버린 고조부가 1933년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행적에 대해 아직도 궁금함이 많다.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것은 경기와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기호흥학회(교육을 내걸고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던 단체,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찬무원, 세심회 이사 등을 지냈다는 것이다.

송중화씨는 “서울에 99칸 집이 있고 경기도 과천에도 땅이 있었으나 ‘1933년 고향으로 내려올 당시에는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들었다”며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서울에서 사주팔자를 봐주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고조부의 삶이 학계의 연구를 통해 정확히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송씨는 또 동학유족으로 등록을 신청한 이유에 대해 “그동안은 고조부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 농민운동 주모자를 설득, 회유하는 판핵사를 지낸 사실만 알고 있었다”며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 재평가가 이뤄져 동학 참가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있는 만큼 고조부에 대해서도 올곧은 평가가 내려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족등록을 신청하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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