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특명 ‘동학군 선동’한 행적 밝혀져
친일파 득세하자 종2품 벼슬 버리고 민족운동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강촌(綱村) 출신(1851년생)으로 순종이 즉위한 융희원년(1907년) 종2품 규장각 대제학에 임명됐으나 매국노 이완용이 총리대신에 오르자 벼슬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민족자강 운동에 뛰어든 우국지사 송정섭 선생의 발자취가 밝혀졌다.

송정섭 선생은 관직을 떠난 뒤 ‘기호흥학회’ 등에서 국권회복운동을 벌이다 잃어버린 벼슬과 재산 대신에 병마를 얻어 1933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83세를 일기로 숨졌으며, 대대로 청주에서 살아온 후손들도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또 여산 송씨 지신공파 족보도 송 선생의 생애에 대해 ‘창의척화(倡義斥和·정의를 부르짖고 외세를 배격함)로 누차 옥고를 치렀다’고만 기록하고 있어 후손들도 구체적인 행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증손인 송해승(68)씨가 1992년부터 14년을 준비한 끝에 2006년 9월에야 청주시 수의동 소재 송정섭 선생의 묘소에 묘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송 선생의 우국 행적 가운데 일부를 찾아내게 됐다. 송씨는 승정원일기 등에서 송정섭 선생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을 일일이 발췌해 복사한 뒤 해석을 의뢰하는 작업을 통해 자료를 모은 뒤 이를 바탕으로 직접 비문을 썼다.

송정섭 선생이 흥선대원군의 특명을 받고 동학군을 선동해 서울로 진격하도록 배후 조종한 이른바 소모사(召募使)역할을 한 것은 올 초 고손자인 송중화(33)씨에 의해 밝혀졌다. 고손자 송씨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고조부의 이름을 검색한 결과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법무아문(法務衙門)의 심문 기록 등 동학관련 자료에서 고조부의 이름이 검색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일제가 1894년 6월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자 측근 관리들을 비밀리에 동학군과 지역토호들에게 보내 동학군의 서울 진격을 도모하도록 했다.

▲ ‘이 분(앞줄 맨 왼쪽)이 바로 송정섭 선생’ 흥선대원군은 동학군을 서울로 끌어들임으로써 일본군을 몰아내려 했다. 청주 출신의 송정섭 선생은 이와 관련해 대원군의 밀사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렀는데, 최근 동학유족등록 과정에서 후손들에 의해 그 삶의 궤적이 밝혀졌다. 사진은 1907년 종2품에 오른 송정섭 선생의 모습. 선생은 매국노 이완용이 총리대신에 취임하자 벼슬을 버리고 기호흥학회 등에서 민족자강운동을 벌였다. 사진 제공/ 송정섭 선생의 증손 송해승씨.
고조부가 농민반란을 평정하는 판핵사(반란 주모자를 꾸짖고 회유하는 관리) 역할을 한 것으로만 알았던 고손자 송씨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지난 3월 충북도에 동학유족등록을 신청했다. 송정섭 선생의 후손에 대한 동학유족등록 여부는 충북도 실무위원회의 조사와 검토를 거쳤으며 다른 신청자 16명과 함께 중앙심의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결정될 예정이다.

신청자들에 대한 조사작업을 주도한 충북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신영우 교수는 “송정섭 선생이 충청도 사람일 것이라고는 추측했지만 정확한 연고를 찾지 못했는데 이번에 후손들이 동학유족등록을 신청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찾게 돼 너무나도 감격스럽다”며 “알지 못했다면 죄로 남을 일이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또 “한말 일제하에서 유교지식인으로 기풍을 지킨 송정섭 선생의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왕명 사칭한 송정섭을 잡아라?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984년(고종 31년) 음력 11월2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전 교리 송정섭을 나수(拿囚·붙잡아 가둠)해 조사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라는 좌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전 교리 송정섭이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왕명을 사칭해 소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법무아문으로 하여금 나수하여 엄히 조사한 다음 품처(稟處·명령을 받아 일을 처리함)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 내용대로라면 송정섭 선생은 요즘 흔히 신문 사회면 기사에 등장하는 사칭 범죄자에 불과하다. 친일 개화파에 의해 장악된 당시의 내각이 흥선대원군 혹은 왕명에 의해 밀사로 활동하던 송 선생을 범죄자로 몰아 체포하도록 고종에게 간청했고, 결국 왕이 이를 윤허한 것이다.

송정섭 선생이 언제 어떻게 붙잡혔는지는 모르지만 그로부터 약 석 달이 지난 1985년 2월9일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법무아문의 공초기록에 송정섭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관리가 “송정섭을 아는가?”라고 묻자 “다만 충청도 소모사(召募使·사람을 모으는 역할)라고만 소문으로 들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틀 뒤 이뤄진 2차 신문에서도 같은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지금까지의 내용만 살펴보면 송정섭 선생이 동학과 관련해 소란을 선동한 것은 사실이나 과연 왕명을 사칭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막은 조선의 기록이 아닌 주한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일본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에게 보낸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갑신정변 이후 1885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한성조약의 일본 측 대표였다.

日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
이노우에가 1895년 5월 무츠에게 보낸 공사관 기록의 제목은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에 관한 전말 보고>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손자로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훗날 친일파로 변절했다.

보고서의 첫 장의 요약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이 ‘첫째, 밀사를 평양에 보내 청나라 군대의 대거 남하를 촉구할 것. 둘째, 동학당을 선동해 경성에 끌어들일 것. 셋째, 첫째와 둘째 수단을 써서 일본군을 협격해 경외로 쫓아낼 것. 넷째, 개화당의 중진인물인 김굉집, 김학우, 김가진, 안동수, 조의연, 유길준, 김종한, 이윤용 등을 암살할 것…’ 등을 음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충북대 사학과 신영우 교수는 이에 대해 “일본 공사관의 기록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의 힘을 빌려 일본군을 몰아내려했던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면서 “송정섭 선생은 그 일선에서 일했던 중요한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은 송정섭 선생에 대해 ‘흥선대원군이 전 교리 송정섭에게 밀서 3통을 주어 충청도의 토호와 명족(名族)들과 동학당을 선동하는 일을 도모하도록 하고(옥천 거주 송 대신(大臣)의 아들 판서 송병서, 연산 거주 고(故) 김 대신의 손자 교관 김영길, 노성 거주 진사 윤자신 등 세 사람에게 교부함) 또 이용호를 경상도로 보내…(후략)’라며 세세한 내용까지 전하고 있다.

신영우 교수는 “대원군의 밀서를 받은 인물 가운데 송병서는 우암 송시열의 9대손이자 좌의정을 지낸 송근수의 아들로, 당시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을 정도의 거물이었다”며 “명문가들이 동학농민운동에 간접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송정섭 선생 등 대원군의 밀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접근하지 못했던 영역인데 다행히 후손들이 나와서 아주 의미가 크다”며 “다만 동학농민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을 내쫓기 위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동학유족으로 인정할 지에 대해서는 논란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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