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건반-타악 밤무대 거쳐 방송에서 활약
폭넓은 음악세계 익히려 늦깎이 ‘작곡 전공’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로 시작하는 1950년대 가요 ‘댄서의 순정(작사 김영일/작곡 김부해/노래 박신자)’은 ‘울어라 색소폰아’로 마무리된다. ‘그대는 몰라’가 두 번 반복되는 가사의 후반부처럼 아무도 댄서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정작 감정이 이입돼 대신 울어주는 것은 색소폰이다.

▲ 사진=육성준기자
색소폰은 흔히 밤무대 악기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군악대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악기다. 1800년대 중반 벨기에 사람인 ‘아폴로 색스’가 국왕의 명령에 의해 목관악기인 클라리넷을 개조해 만들었으며, 1846년 프랑스 파리에서 특허를 얻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몸체는 금관이지만 소리의 떨림이 시작되는 마우스피스에 대나무(예전에는 갈대)를 종잇장처럼 깎아서 만든 ‘리드’를 끼우기 때문에 정작 소속은 목관악기다. 따라서 금관이 내는 화려함과 목관이 내는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심금을 울리는 독특한 음색을 토해낸다. 작사가는 그래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댄서 대신 목놓아 울어줄 개체로 색소폰을 택한 것이다.

젊은 색소폰 주자 안태건(38)씨는 색소폰이 사람의 목소리처럼 다양한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색소폰은 음정이 불안정한 독특한 울림이 특징인데, 이를 이용해 갖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는 것.

안씨는 또 “기타의 손가락 기술처럼 음을 끌어올리거나 내리는 ‘피치밴딩’, 찢어지는 소리를 내는 ‘칼톤’, 바람이 새는 소리를 내는 ‘서브톤’ 등이 그 예”라고 설명했다. 모든 악기의 기본인 피아노도 88개 건반이 음역의 전부지만 색소폰은 다루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음역을 넘어서 가성을 낼 수 있다는 얘기다.

初-고적대, 中-기타, 高-그룹사운드
안태건씨가 뮤즈(음악의 신)의 유혹에 빠져든 것은 음성군 수봉초등학교 재학시절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의 형이 연주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홀려 매일 같이 그 집에 드나들며 어린 나이에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안씨의 집 벽장에는 낡은 클래식 기타가 있었는데, 이는 한때 서울시 동대문구 평화시장에서 원단 납품업을 하던 안씨의 아버지 안수경(73)씨가 즐겨 연주하던 것이었다. 이 기타는 아버지가 직물기계에 손가락 몇마디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 뒤로 벽장 안에 쳐박혔다가 코흘리개 아들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안씨는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적대에서 작은북을 쳤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며 음악과의 인연이 숙명에 가까웠음을 털어놓았다.

▲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연주활동을 하던 안태건씨의 독주장면. 사진제공=안태건
점입가경이라고나 할까? 안씨는 음성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1980년대 중반 시골 고등학교까지 몰아친 그룹사운드 붐을 목도하게 된다. 3학년 선배들의 합동연주회를 듣고 마력과도 같은 힘에 전율을 느낀 것이다.

당시 연주에 참여한 그룹사운드의 이름이 ‘철부지’, ‘무지개’, ‘야생마’였음을 기억할 정도. 이후 안씨는 동급생들과 함께 ‘소나기’라는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드럼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또 학교 기악부에 들어가 처음으로 색소폰과 인연을 맺게 된다. ‘주색야고(晝saxo夜敲)’의 3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무작정 상경, 밤무대에서 잔뼈 굵어
1988년 안씨는 고교졸업과 함께 대학 진학(기악과)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농사를 짓는 집안 형편에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서울 종로 낙원상가의 악기상들을 찾아가 ‘색소폰 주자 안태건’의 명함을 돌렸고, 3개월만에 일당 3만3000원 짜리 일자리를 찾게 된다. 신촌에 있는 ‘1번지 스탠드바’였다.

당시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로, 거품호황이 극에 달한데다 노래방마저 없던 시절이라 이른바 ‘오브리(오블리카토의 변형·즉석 반주의 의미로 쓰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스탠드바의 인기가 대단했다. 1번지 스탠드바의 출연진도 쟁쟁했다.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을 비롯해 ‘돌팔매’를 부른 오은주 등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최근 ‘땡벌’로 스타덤에 오른 강진은 가수가 아니라 쇼 사회자였다.

3년 동안 1번지에서 일하다가 군에 입대한 안씨는 1992년 제대와 함께 보다 큰 무대에 서는 기회를 잡게 된다. 당시 롯데월드에 있던 나이트클럽 허리우드에서 그룹사운드 ‘프리’의 구성원으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프리의 마스터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1기 드럼 주자였던 이건태씨였다. 안씨는 색소폰과 건반 주자를 맡아 종횡무진 활약을 벌이게 된다.

오브리 반주에 이어 밤무대 그룹사운드 활동은 안씨를 최고의 실전감각을 갖춘 선수로 만들었다. 안씨는 “당시 밤무대 그룹사운드 주자들은 자신의 악보를 직접 만들었다. 마스터가 가수의 신곡을 테이프에 녹음해 던져주면 각자 자신이 연주할 부분만 악보로 땄다”고 회상했다.

캬바레 A밴드에서 방송출연까지
흔히 ‘카바레’하면 중년 무도장을 떠올리지만 당시 서울에 있는 대규모 카바레의 연주진은 12~15인조로 이뤄진 전문악단이었다. 대개 방송국의 단원들이 부업을 뛸 정도로 연주의 수준도 높았다. “그래서 악단을 A밴드, 그룹사운드를 B밴드라고 불렀다”는 것이 안씨의 설명이다. 또 A밴드는 B밴드와 달리 정식 악보를 보고 연주했다.

안씨는 B밴드 활동에 이어 A밴드에서 일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장안평의 ‘무학성’, 한강호텔 카바레 등이 활동무대였다. 나훈아, 현철 등 일류가수의 노래를 반주한 것도 이때였다.

1997년 안씨는 10년 밤무대 경력을 바탕으로 방송계로 진출한다. 실력파 가수들이 라이브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KBS의 인기프로그램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연주자로 일하게 된 것. 이소라의 프로포즈는 MR(녹음된 반주·Music Recorded)이나 AR(립싱크·All Recorded)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안씨는 이 무대에서 색소폰을 독주하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안씨는 타 방송국의 경쟁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MR이나 AR을 틀고 뒤에서 시늉만 하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안씨는 “지금도 잘 나가는 쟁쟁한 가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립싱크를 했고, 우리는 아예 코드도 연결하지 않고 폼만 잡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버클리, 줄리어드는 못가도…
안태건씨는 정점을 향해 치닫던 이 시절에 새로운 결심을 한다. 보다 성숙된 음악을 하기 위해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결심한 것이다.

안씨는 “감각에만 의존한 음악은 껍데기만 갖고 가는 느낌이 들었다”며 “버클리, 줄리어드는 못가더라도 이론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밝혔다. 안씨는 2002년 서원대학교 작곡학과에 입학한다.

안씨는 작곡학과를 택한 이유에 대해 “피아노나 관현악, 기악, 국악은 물론 성악까지도 기존의 창작물을 각각의 도구를 이용해 표현하는 것이지만, 작곡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분야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안씨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피아노를 체계적으로 배웠고, 음악의 화성, 편곡법, 대위법 등을 익혔기 때문이다. 특히 컴퓨터 음악을 공부함으로써 급변하는 세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안씨는 “과거에는 피아노 건반 하나 하나를 두드리며 곡을 썼지만 이제는 컴퓨터 음악을 모르면 작곡을 할 수가 없다”며 “컴퓨터를 이용해 64인조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다 합성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2006년 2월 대학을 졸업한 안씨는 대학 은사인 이병욱 교수가 이끄는 퓨전국악단 ‘어울림’을 비롯해 직지팝스오케스트라, CJB 교향악단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CJB 교향악단에서 색소폰 주자를 단원으로 선발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안씨는 또 주성대 실용음악과, 충주대 음악과에 출강하고 있다. 이밖에 개인교습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안씨의 제자 중에는 특히 개업의가 많은데 ‘의사선생님’들로부터 꼬박꼬박 ‘선생님’ 대접을 받는다.
안씨는 “방송에서 함께 활동했던 멤버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보면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색소폰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일에서 더욱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진화하는 뮤직머신 색소폰

운지에 따라 동력 전달하는 구조 볼수록 신기해
소프라노·알토·테너·바리톤… 모양도 각색

색소폰 하면 무조건 하부가 S자형으로 구부러진 금속 악기를 떠올리는데 알고 보면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세계적인 색소폰 주자 케니G가 부는 클라리넷(일직선) 모양의 색소폰은 소프라노다. 소프라노 다음으로 높은 소리를 내는 알토는 크기가 작고 목 부분이 일직선으로 구부러졌다. 테너, 바리톤으로 갈수록 크기도 크고 굵은 소리를 내며 목 부분의 구부러짐도 심하다.
기본 4가지 외에도 전문가들이 주로 부는 소프라니노, 베이스, 콘트라베이스 등 색소폰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색깔도 금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은도금을 한 ‘실버’도 있는데 색깔에 따라 소리의 성격도 다르다고.
색소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악기라기보다 뮤직머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목·금관 악기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에 속하는 색소폰은 운지에 따라 동력을 전달하는 구조가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안태건씨는 “일본의 아카이나 야마하에서 만든 전자 색소폰까지 있어 건반악기나 현악기의 음률까지 흉내내지만 전통 색소폰이 내는 영혼의 울림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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