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등산로 얼음 서비스의 숨은 주인공
아이스크림 노점, 등산객 질문엔 “난 몰라요”

열나는 여름에도 팥죽땀을 쏟으며 굳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땀흘린 노력 끝에 맛보는 정상 정복의 쾌감 때문일 것이다.

청주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는 산행코스 가운데 하나가 상당산성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산의 여정도 그럴싸하고 천년세월에도 꼿꼿한 성벽의 등허리를 밟는 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당산성 산행의 절정은 정상 직전에 있는 나무계단이다. 산타기에 능숙한 산사(山師)들도 이쯤에서 숨을 한번 고른 뒤에야 정상도전에 나선다.

사진_육성준기자
그런데 2005년부터 이 나무계단 어귀 나무의자에 다듬이돌만한 얼음덩이가 놓여지기 시작했다. 골판지로 만든 푯말에는 ‘얼음골, 더위를 식히고 가라’는 친절한 안내문까지 서툰 매직 글씨로 쓰여 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 얼음덩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손이나 수건에 냉기를 묻혀 얼굴에 부비며 즐거워한다.

얼음덩이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주말과 휴일에만 보이던 것이 올해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예외는 없다. 이쯤되면 등산객들이 얼음덩이를 보며 날마다 수고를 아끼지 않는 숨은 봉사의 주인공을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취재를 하기 위해 문제의 장소를 찾은 일요일(7월22일) 오전에도 얼음골 앞은 붐볐다. 얼음덩이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 이런 게 있네”라며 신기해한다. 하지만 매일이다시피 상당산성을 오르는 사람들은 귀동냥으로 숨은 봉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얼음 속에 도라지꽃이 핀 사연
누군가 “저 위에 아이스크림 장사가 가져다 놓은 거래”라고 말하자, “아니여~, 시(청주시)에서 가져다 놓았겠지”하며 잠시 갑론을박이 오가지만 결론이 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또 다른 일행이 “노점을 하던 아저씨가 노상에서 장사를 못하게 되니까 여기까지 올라왔고, ‘사적지에서 장사를 한다’는 죄스러움에 봉사를 하는 거야”라며 내막을 꿰고있는 듯 아는 소리를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흥덕구청 세무과 공무원인 김동성씨는 북극곰처럼 얼음 위에 달아오른 볼을 비비며 “아이 시원해”를 연발한다. 김씨는 “고마워서 아이스크림을 꼭 사먹는다”는 말도 덧붙인다.

자주 산성을 찾는다는 장현숙씨는 “(아이스크림 아저씨에게) 예전에 ‘아저씨가 얼음을 갖다 놓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다. 나도 모른다’고 했는데, 최근에야 목격자들의 말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됐다”며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일부러 사먹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얼음골에 놓인 얼음은 2장. 얼음과 얼음 사이에는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꽃이 여러송이 들어있었다. 날마다 얼음을 가져다놓는 사연만큼이나 얼음 속에 꽃송이를 넣어 얼린 사연도 궁금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얼음꽃이 주는 메시지는 ‘얼음을 깨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을 위해 가져다 놓은 얼음을 깨서 가져가는 사람이 종종 있어 꽃을 넣어 얼린다는 것.

곱씹을수록 따뜻함이 느껴지는 경고메시지다. 또 꽃이 주는 메시지만으로도 얼음을 깨는 사람이 없어졌다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궁금한 마음에 줄달음을 놓아 문제의 숨은 봉사자를 만났다.

매일 새벽 4시 지게로 얼음 날라
“기사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한사코 만류하는 숨은 봉사의 주인공은 김흥환(51)씨였다. 김씨는 “평일에는 얼음만 가져다 놓고 주말과 휴일에는 아이스크림을 판다”고 말했다. 듣던대로 김씨는 20년 가까이 청주에서 아이스크림 노점을 했다. 주로 학교 근처나 행사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2005년 3월부터 산성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김씨가 산성까지 올라온 사연은 건강이 좋지 않아 20년째 등산을 다니다보니 어느날 문득 ‘산성 위에서 곶감을 팔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 곶감장사로 산성에 좌판을 연 김씨는 4~9월에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나머지 기간에는 곶감을 판다.

“이런 데서 장사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도 곶감이고 아이스크림이고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등산객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에 주변을 청소하고 얼음을 갖다놓게 된 겁니다…” 김씨가 매일 얼음 지게를 지고 산성을 오르게된 사연이다.

김씨의 출근시간은 새벽 4시다. 수곡동 집에서 나와 얼음과 아이스크림 판매에 필요한 작은 손수레 등을 짐칸이 달린 오토바이에 싣고 명암약수터 혹은 산성마을까지 옮긴 뒤 거기에서부터 지게로 짐을 나른다. 짐을 부리는 횟수만 평균 4~5차례다 보니 짐을 다 옮기고 주변을 청소하면 시나브로 오전 8시다.

김씨는 “장삿속으로 비치는 것이 싫어서 처음에는 얘기를 안했는데 어느덧 소문이 나서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됐다”며 겸연쩍어 했다. 하지만 대략 5~9월 날마다 얼음 지게를 지는 노고를 생각할 때 이를 장삿속으로 매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이스크림 장사만 해도 그렇다. 등짐을 지면서까지 산 위에서 좌판을 벌일 사람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흰 드레스셔츠에 카우스버튼까지
김씨의 아이스크림은 유명상표가 아닌 ‘길표’지만 이를 파는 김씨의 복장을 살펴보면 예사롭지가 않다. 여러차례 등짐을 지고 산을 올라야하기 때문에 등산화에 등산복 바지를 입고 있지만 상의는 긴팔 드레스셔츠다. 소매 끝에는 카우스버튼을 달고, 흰장갑까지 꼈다.

옷을 갖춰 입는 이유를 물으니 “아침에 짐을 옮기느라 땀을 흘리니 갈아입을 수밖에 없다”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오히려 아이스크림을 퍼 줄 때마다 통 입구를 닦는 행동에서 답을 찾아낼 수 있다. ‘먹는 음식을 파는만큼 최대한 정결해야 한다’는 것이 김씨의 지론.

어찌보면 매일 얼음을 가져다놓고 더운 날씨에도 정장을 차려입는 모든 행동과 행색에서 김씨의 차별화된 ‘프로정신’을 읽을 수 있다.

김씨가 파는 아이스크림은 1개에 1000원이다. 과자고깔에 3번을 눌러서 퍼 담아 줘도 비싸다고 투정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물론 꼭대기까지 올라온 걸 생각하면 싸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매일 얼음을 나르는 수고는 가격에 포함돼있지 않다. 하루에 100개 정도를 판다는데, 그래서 ‘얼마나 남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어찌됐든 산성 위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로 김씨에게 도전하는 것은 무모하다. 굳이 산 위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려는 사람도 없겠지만 등산객들 사이에 소리없이 퍼진 ‘신뢰 바이러스’를 당해낼 길은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요즘에는 주말과 휴일에 1000여명이 넘는 등산객들이 몰린다”며 “날이 갈수록 산성을 찾는 등산객들이 늘어나 수입도 늘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또 “연중 최고의 대목은 충청리뷰의 산성껴안기 가족산행이 있는 날”이라며 “이날 매출은 일반 휴일의 3~4배 정도가 된다”고 귀띔했다. 그래도 김씨의 수입은 뻔할 수밖에 없다. 어림짐작해 봐도 신통한 것은 수입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사는 김씨의 삶 그 자체다. 

무거워도 좋아…
김흥환씨의 쇠지게에 실리는 것들


· 사랑을 지고 오르는 김흥환씨의 쇠지게는 자체 무게만 10kg이다.
· 여기에 평일에는 다듬이돌보다도 큰 얼음이 1장, 주말과 휴일에는 2장이 실린다.
· 평일에는 얼음만 놓고 내려오고 주말과 휴일에는 장사에 필요한 물품도 이 쇠지게로 나른다.
· 작지만 바퀴가 달린 손수레와 아이스크림 상자 등 모두 4~5번을 날라야 한다.
· 1차 도착지에서 짐을 지고 올라가 내려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 짐을 나르고 주변을 청소하는데 꼬박 3~4시간이 걸린다.
· 한 번에 나르는 무게가 평균 40kg 정도이니 신새벽 혼자서 얼음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김씨의 모습은 차라리 구도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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