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장무 시인

   
신록의 오월이 간다. 아쉬운 마음에 노천명의 절창 ‘푸른 오월’이나 읽어 보자.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모여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숲 어디에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접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 한가 나의 사람아.’

추억처럼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며 정녕 ‘잃어버린 날들’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없는, 흘러가버린 시간의 저편에만 존재하는,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소중한 것들. 무엇이 소중한지도 모르고 물질의 노예, 속도의 노예, 정보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망각의 강 건너 물살위에 반짝이는 소중한 가치들을 우리는 가끔씩이라도 소리쳐 불러보아야 한다.

생활의 편린 속에 아직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순수의 딱지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필부필부에게 삶의 청아한 바람이 되어주는 순수의 잎사귀들, 그것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날들’ 속에 있는 ‘풀냄새 물큰’ 나는 ‘향수’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혹자들이 말하는 인간구원의 순수세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 한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로 가보자. 1970년대 초반쯤으로, 지금은 수몰된 남한강변의 어느 강촌. 그곳 학교 선생 두 사람과 마을 이장, 셋이서 강 건너 합수머리로 천렵을 나갔다. 때는 노랗게 허리통이 굵어진 보리를 베고, 논에서는 한창 모를 찌는 초여름의 햇살 좋은 날이었다. 그들은 오리그물로 고기를 몰고 투망을 던져 즉석에서 생선회를 즐겼다. 대두병 소주 하나가 금방 바닥이 나고, 또 한 병을 더 해치울 때쯤 해는 기울어 오뉴월의 저녁내가 밀려들었다. 제법 취한 그들이 강둑을 벋어나 행길가로 접어드는데, 반대편에서 한 젊은이가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이장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큰 소리로 뭐라 하더니 삽시간에 두 사람이 주먹다짐을 한다.

이런 와중에 청년의 등에 걸머쥐고 있던 가마니 속에서 새끼돼지 두 마리가 튀어나와 길 건너 산속으로 도망쳐버렸다. 그 통에 싸움은 그치고 모두들 새끼돼지를 찾느라 야단법석을 떨다가, 날이 어두워 끝내 찾지 못하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헤어졌다. 이튿날 젊은이의 부친께서 학교를 방문하고, 그들을 읍내 지서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세 사람이 곧바로 그들이 사는 곳으로 달려가니, 깊은 산 중턱에서 산전을 일구고 사는 화전민 가정이었다. 마침 장날이라 읍내에 나가, 잘 길러서 누이 혼사 때 쓸 새끼돼지 두 마리( 당시로는 꽤 큰 가치임)를 사가지고 오다가 술기운에 서로 그리된 것이었다. 세 사람은 돼지값을 두둑이 내놓고 사과를 하는데, 자세히 보니 젊은이도 이장처럼 눈퉁이가 시퍼렇게 멍들고 다리를 절룩인다.

잠시 후 술상이 나오고 말씀이 오가는 사이에 어느덧 취흥이 오르고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들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좋은 기분으로 거나해졌다. 끝내 받지 않으려는 돼지값을 쥐어주고 산길을 내려오는 세 사람의 등 뒤에서 호롱불을 받쳐 든 노인네 식구들이 조심해 가라고 손사래를 친다.

별것 아닌 구닥다리 얘기 같지만, 그때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사람 사는 마을에 크고 작은 다툼이나 갈등은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웬만하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며, 그렇게 상생의 삶을 살았다. 으레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다.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송사가 그치질 않고, 도처에 경쟁이나 시새움에서 발현되는 미움과 증오의 싸늘한 바람만 가득하다.

무엇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 시켰는가. 물질만능주위가 부르는 무서운 이기심과 그에 따른 폭력과 음모, 배신과 갈등, 상대적 가난과 질병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결국 그것은 ‘잃어버린 날’들 속에 ‘향수’처럼 담겨있는 순수 인간성의 세계를 회복해야 하는 까닭에 있지 않을까.

세상이 코웃음을 쳐도 자주 순수해지자. 이런 세상일수록 바보처럼 순수에 골똘하자. 계절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가 주는 설레임 속에서, 문득 문득 치솟는 어린 날의 추억이 주는 잘 익은 그리움 속에서, 그리고 그대와 나의 사랑과 화해 속에서, 밀물처럼 샘솟는 순수한 영혼을 길어 올리자.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의 소설, 1921년 플리쳐상,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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