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청주대박물관, 복원 학술조사보고서 발간



읍성 북문 복원 가능, 매몰 남석교 노출시켜 유리바닥 공개
청주시의 상징적인 유적인 청주읍성(淸州邑城)과 남석교(南石橋)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보고서가 청주시와 청주대박물관 연구팀에 의해 발표됐다. 고려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읍성은 청주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귀중한 유적이며 현재 지하에 매몰돼 있는 남석교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석교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청주읍성은 일제강점 초기에 철거돼 흔적조차 미미하고 남석교는 지하 30cm아래 파묻혀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따라 지난 94년 지역 시민문화단체에서 청주읍성의 동·서·남·북문터에 각각 표석을 세워 시민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또한 남석교도 지난해 중앙공원으로 이전복원한 망선루처럼 발굴조사와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청주시는 이러한 학계, 시민단체의 뜻에 따라 정확한 실체파악을 위한 학술조사를 실시키로 하고 지난 3월 청주대박물관과 용역계약을 체결해 250일의 연구기간을 거쳐 최종보고서가 완성되게 됐다. 특히 남석교 복원문제에 대해서는 남석교 주변 재래시장 활성화에 힘을 기울여온 청주경실련과 청주청년회의소가 조사단과 함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청주읍성 복원 가상도
■ 청주읍성 ■
청주읍성은 상당구 중심부인 성안동 일대에 둘레 1700m 규모의 타원형으로 둘러쌓은 성이었다. 일반적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청주목의 읍성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조사단은 그 전신이 신라시대의 서원소경성 또는 서원경성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보다 앞선 시기인 백제시대 상당현의 읍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밝혔다. 또한 읍성안에 남아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은 고려초기부터 이곳이 청주의 중심된 시가지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읍성 안은 물론 외곽의 평지까지 지적의 구획과 도로망이 네모꼴의 구역으로 짜여져 있는 것은 고대의 나성(羅城)내부에 있는 도시구획과 신라 도읍지인 금성의 방리제(坊里制)를 모방한 도시계획의 전형으로 분석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함락됐던 청주성이 조헌, 영규대사, 박춘무등이 이끄는 의병, 승병에 의해 탈환된 것은 임진왜란중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청주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인식돼 효종2년(1651년)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도병마절도사의 주둔지인 병영이 해미(海美)로부터 청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청주읍성은 병영성으로 번화하게 되고 경제규모도 커져 청주목 관아지역과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구역으로 구분되게 된다.
조선시대 성종 18년(1487년)에 다시 축조되어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시구개정사업(도시정비사업)으로 철거되기까지 존속됐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 벌인 시구개정사업에서 읍성을 철거하고 나온 성돌은 하수구등의 축대를 쌓는데 이용했다. 이번 조사에서 청주 남문로1가 가구점 골목의 김철수씨 집에서 일부 성돌을 찾아낸 것은 최대의 수확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시내일원에 읍성과 관련한 유구들이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들어 향후 하수구등의 정비사업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복원방안

청주읍성의 남문은 읍성의 정문이었고 일제 초기에 찍은 사진이 남아있어 원형대로 복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청주약국 주변의 밀집상가 지역으로 복원이 사실상 힘들고 반대쪽 성안길 입구의 북문 복원이 실현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북문터에서 도청으로 꺾는 노변공원에 성벽을 복원하고 서북쪽 모서리인 대한투자신탁앞에 성벽분위기를 보여주는 조형물 설치가 가능하다. 특히 북문쪽 성벽이 사직로와 접해 청주시내 중심지로 진입하면서 가장 큰 시각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중앙공원 서쪽의 담장을 허물고 YMCA건물까지 성벽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으며 담장을 대신할 수 있는 방안도 시도해 볼 수 있다. 특히 중앙공원은 조선시대 충청병영이 있던 역사적 장소로 성벽복원을 통해 사적공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남문의 상징적인 복원과 옛 성벽 터를 따라 세워진 현존 고층건물의 외벽에 일정 높이까지 성돌을 붙인다든지 모자이크 등으로 조형처리하여 성벽의 이미지를 창출하자는 방안도 시민들의 협조를 통해 가능한 방법으로 꼽고 있다.




남석교 복원 가상도
■ 남석교 ■
조선시대 남석교의 공식명칭은 대교(大橋)였으며 일명 남석교 또는 정진교(情盡橋)라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청남교(淸南橋)라 부르기도 했는데 청주읍성의 남문이 청남문이었고 여기서 남쪽으로 쭉 뻗은 길에 연결되는 이 다리를 청남교라 했다는 분석이다. 남석교의 위치는 청주약국∼육거리 시장 사이의 동명약국-구 석교동파출소 구간에 폭 4.7m, 길이 62∼80m로 아스파트 노면 바로 밑에 누워있다. 인근 하수수 맨홀로 들어가면 남석교의 일부 멍에석, 장귀틀등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석교의 최초 건립연대는 신라 진흥왕 19년(558년)에 남석교를 수선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남석교가 그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석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적어도 1530년 이전에 건립된 오래된 돌다리임에는 틀림없다는 분석이다. 조선후기에 홍수등으로 2차례 개축한 기록이 나타나며 1906년 대홍수로 무심천 유로변경이 이뤄졌고 1932년 석교동 제방공사로 인해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복원 및 활용방안

상가밀집지역에 매몰된 남석교는 이전복원보다는 발굴 노출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한 명소로 가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무심천의 유로변천과 청주 도시계획의 변화과정을 알려주는 남석교는 도시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므로 다른 장소로 이전은 불가하다는 분석이다. 장기적으로 발굴조사후 남석교를 해체하고 원위치에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이 최선으로 꼽히고 있다. 단기적으로 매몰된 남석교의 일부 구간을 노출하여 아스콘 포장을 제거하고 방탄유리로 덮어 이 길을 통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문화유산과 접하도록 하는 것이다.
남석교를 알리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는 현재의 노면에 남석교의 상판석 모형을 제작해 사람과 차량의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3cm정도 돌출시켜 재현하는 것이다. 남석교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장기적인 발굴과 복원을 위한 준비단계의 차원에 접근할 만 하다. 정월대보름 답교놀이와 같은 공간체험을 통하여 역사적 공간을 접할 수 있는 광장으로 조성하고 여기서 문화예술활동과 각종 이벤트가 이뤄지도록 유도함으로써 다목적 이용이 가능한 다리, 또는 주변광장의 형성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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