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장 무 시인

   
미국 텍사스의 거대도시 댈러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 고속도로를 달리면 포트워스라는 인구 40만쯤 되는 중소도시가 있다. 두 도시 사이에는 포트워스 댈러스 국제공항이 있어 대한항공이 주 2회 여객기를 띄우고 있고, 또 박찬호 선수가 거액을 받고 들어가 별로 솜씨를 발휘하지 못한 텍사스 레인저스의 야구장도 있다.

십여 년 전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는데, 지평선 너머로 이어지는 광활한 초원과 끝없는 밀밭 그리고 수천마리가 몰려다니는 소떼들, 간간이 서있는 오일시추탑을 보시고, ‘참 풍요로운 땅이구나’ 하신 적이 있는 곳이다.

어느 해던가 나는 포트워스에서 근 한 달간을 머무른 적이 있다. 한 지인이 이곳 대학의 저명한 회계학 교수로 있어서 그의 집에 머물면서 텍사스 땅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다. 멕시코 풍의 느긋한 낭만과 애수의 도시 샌 앤토니오, 눈부신 해변가에서 하늘을 쏘는 휴스턴의 NASA본부, 그리고 텍사스사람들의 장렬한 애국심을 자랑하는 알라모 요새 등등, 그러나 이런 눈요기보다 강한 인상으로 내게 다가선 것은 ‘포트워스시립미술관’이었다.

이곳에는 최근에 세운 대단한 규모의 ‘현대미술관’이 있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보스턴미술관’들과 자웅을 겨루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텍사스 오일머니에 의한 부의 과시에 불과해 보였다. 그보다도 나는 이 자그마한 ‘시립미술관’에서 더 큰 자극을 받았다.

그저 우리네 교실만한 방이 몇 개 붙어 있는 크기에, 모두 상설전시관으로 짜여져 있고, 기획전시실은 한곳 정도였다. 그리고 관람객들도 대부분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들이나 중고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전시실 안에서 안내하고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도우미들도 직장에서 은퇴한 할머니 할아버지 자원봉사자들이였다. 언뜻 보기에도 학생들을 위한 미술관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미국의 중소도시 정도에 해당하는 이곳의 학생을 위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의 내용들이였다. 루벤스와 렘브란트로부터 세잔느, 마네, 모네, 폴 고갱, 반 고흐, 헨리 마티스, 칸딘스키, 모딜리아니, 샤갈,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까지 그 이름만 들어도 황홀한 세계적 대가들의 그림이 줄줄이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지만, 참 부러웠다. 돈이 많은 도시라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의 다른 면모, 즉 도로나 가로수 그리고 공원이나 상가 건물, 아파트 같은 것들은 결코 우리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세금은 미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월등히 낮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학생들에게 세계적 예술품에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이 참으로 부러웠다. 미술관 안에는 그림 앞에서 열심히 그 그림을 베껴 그리는 아이들, 조용히 토론하는 중고생들, 해설자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엄마 아빠들, 이런 풍경들이 너무 보기 좋았다.

이제 잠시 우리가 사는 도시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시에도 예술의 전당을 비롯하여 박물관과 공예관, 그리고 몇 개의 전시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대부분 성인 중심이고 지엽적이거나 왜소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또한 전시되는 내용도, 너무 ‘우리’에 대한 근시안적 집착으로 말미암아, 무한하고 신선한 예술적 상상력과는 별개로, 어느 한 쪽만을 강요하고 있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 것에 대한 강조도 중요하지만 세계성을 극복하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

괴테는 말했다. ‘민족적 증오는 괴상한 것이다. 그것은 문화수준이 낮은 곳에서 언제나 가장 강하고 가장 난폭하다.’ 무시무시한 말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은 영혼을 비옥하게 하고, 인간 정신을 승화시키며, 우리를 더욱더 정진하는 국민으로 만든다.’고. 우리도시도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지역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 하나 정도는 운영할 때도 되었다.

아담하게 지어진 ‘청주시립미술관’ 안에서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위인들의 귀중한 말씀을 듣기 위해, 그들이 입을 열기를 조용히 기다리듯이, 좋은 그림 앞에서 서서 검은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시라. 그것은 참으로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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