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대는 6대 총장선거를 두번 실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때 선거규정 시비외에도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 교수사회가 한동안 분열되는 양상을 빚었다.
6대 선거 때는 선거후유증에 시달려
직선총장 이택원-이낭호-주자문총장 탄생
첫 직선총장은 이택원 교수(농대 축산과)였다. 1차 투표에서 재적교수 과반수의 득표자가 없을 경우에는 재투표를 실시하고, 여기서도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때는 최고득표자와 차점자에 대해 결선투표를 하여 다수득표자를 당선자로 하도록 하고 있어 그 때도 결선투표까지 진행됐다. 당시 이택원 총장은 결선에서 222표를 얻어 168표를 얻은 이낭호 교수를 따돌리고 당선돼 4년 동안 4대 총장의 임무를 수행했다.
5대 총장은 93년 12월 탄생된 이낭호 교수(공대 화공). 이총장은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259표를 얻어 249표를 획득한 권태준 교수를 1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이총장은 4대 선거에도 출마해 이택원 전 총장과 결선투표에서 맞대결한 전력이 있다.
충북대 총장선거 중 가장 말이 많고 복잡했던 것은 6대 선거였다. 지난 97년 12월 11일 실시된 선거 재투표에서 공교롭게 차점자가 2명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결선투표에서 최고득표자와 차점자 2명 등 3명을 놓고 투표하는 일이 발생했다. 여기서 주자문 교수(사범대 사회교육과)가 222표, 강신우 교수(농대 농경제학과)가 208표, 신방웅 교수(공대 토목공학과)가 168표를 얻어 최종적으로 주자문 교수가 총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충북대는 한동안 선거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차점자 2명을 놓고 우열을 가린 뒤 결선투표를 했어야 했다는 주장과 최고득표자와 차점자 전원에 대해 투표한 것에 하자가 없다는 주장이 맞서 충북대는 급기야 2명의 총장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비록 교육인적자원부의 신임총장 승인절차가 있기 전 일시적인 상황하에서의 ‘1대학 2총장’ 시절이었지만 이 대학 선거 뒷얘기는 여러 대학으로 알려져 오랫동안 가십거리로 등장했다는 후문이다.
이 날 차점자 처리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 후보자 5명은 선관위에 이의신청을 제기했으나 선관위는 총장임용추천위에 이 사실을 접수, 결국 21대 8로 ‘이의신청 부당’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상황이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지만 ‘사건’은 더 확대됐다. 여기에 불복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교수회 임시총회에서는 표결을 거쳐 선거무효를 결정했다. 그러면서 98년 2월 11일 재선거를 치른 일부 교수들은 강신우 교수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한 때 ‘1대학 2총장’으로
교수사회 양분
그래서 대학 내에서는 “당시 최고득점자와 차점자 2명 등 3명을 놓고 결선투표를 하면 누가 당선될지 뻔한 상황이었다. 특정한 사람을 당선시키기 위한 선거였다”는 주장과 “최고득점자가 2명 이상일 때 이들 모두를 결선투표에 올리는 것 처럼 차점자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서는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있었다. 따라서 재선거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해프닝일 뿐이다”는 의견이 맞섰다.
결선투표에서 3명이 붙은 상황이어서 애초부터 과반수를 얻은 당선자를 기대하기란 무리였으나 일부 교수들은 이 점도 문제삼았다. 결선투표라는 것이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 대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임에도 37%의 지지를 얻은 후보를 당선자로 결정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재선거까지 치른 충북대총장 선거는 보수대 진보, 충북출신대 외지출신이 한 판 맞붙은 것이어서 선거규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게 당시 주된 의견이었다. 신방웅·강신우 교수가 대체로 보수노장파들의 지지를 받는데 반해 주자문 총장이 진보소장파의 지지를 받자 신·강교수 측에서는 표를 나눠가질 수밖에 없어 3명이 동시에 치른 결선투표를 반대했던 것.
또 충북출신들을 중심으로한 ‘反호남’ 정서, 즉 전남 구례출신인 주총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역감정도 이런 사태를 불러오는데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반면 재선거에서 총장에 선출됐던 강신우 교수는 충북대출신으로 지역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많이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교육인적자원부는 주총장을 총장으로 최종 승인함으로써 손을 들어줬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느라 취임날짜가 늦어진 주총장은 98년 4월 8일, 선거를 치른지 약 4개월만에 총장 자리에 올랐다. 이 때 깊어진 교수들간의 감정의 골이 오랫동안 남아있어 직선제의 폐단으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직선제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실시된 것인 만큼 다소 문제가 발생해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우세한 편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직선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겪어온 충북대총장 선거과정은 교수집단이라는 우리 사회 최고의 지성인들이 보여준 것치고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은게 사실이다. 특히 ‘언제 우리가 동료교수 였느냐’는 식으로 선거 전후 등을 돌린 모습은 ‘총장이 뭐길래’ 라며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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