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적 갈등보다는 정적 죽이기가 주 목적

다기화된 현대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구도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는 없다. 이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간과하고선 어떠한 사회적 흐름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 수구언론이 진보와 개혁, 시민 노동운동을 패키지로 매도하는 이유는 특정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말에 있을 대선이다.

역사적으로 전환기나 대통령 임기 말엔 여지없이 보혁갈등이 제기됐고, 그 덤터기는 늘 진보쪽이 지게 마련이었다. 보혁갈등이 순수 이념의 충돌이 아닌 정치적 목적, 더 구체적으로 정적 죽이기에 악용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개혁없이는 더 이상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시대의 인물들은 항상 보수와 진보의 사이에서 고민하며 행동했다.

하지만 혁명을 수반하지 못한 개혁은 보수나 기득권에 밀려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실패했어도 그들의 진보, 개혁논리는 역사발전의 토대가 되었고, 기득권층도 이를 일정부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여말 조선 초에 이성계를 등에 업고 개혁을 부르짖다 이방원에게 좌절한 정도전이 그랬고, 수구적 훈구파에 맞선 사림파의 태두로 도학정치를 외치며 조정의 물갈이를 주도하다 정치적 죽임을 당한 조광조가 그렇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념은 사후에 사회, 정치적 이념으로 성장해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다.

50년대 진보당 사건의 주역 조봉암 역시 진보의 대표적 핍박 사례다. 그가 56년 진보당을 창당, 그 해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00만표가 넘는 지지를 받자 이승만의 조바심은 극에 달했고, 결국 빨갱이 굴레를 씌워 처형했다. 그런데 조봉암이 친북 노선을 따랐다는 혐의가 지금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남북평화통일론과 분배를 중시하는 일부 좌파적 경제논리를 편 것이 족쇄가 됐다.

1961년 민족일보 조용수사건도 마찬가지다. 민족일보를 창간, 혁신 진보계를 대변하던 그 역시 북한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5·16 쿠데타세력이 자신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사법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결국 참여정부의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판결이 잘못됐다는 판정을 내려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이 됐지만 진보의 원혼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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