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채소 재배로 다른 농가와 차별화
강외면 중봉리에는 죽은 조상이 아니라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사람의 비석이 있어 화제다. 더군다나 같이 농사짓고 살아가는 무지랭이 농사꾼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어서 더 궁금할 수 밖에 없다. 과연 하사용송덕비가 세워진 까닭은 무엇인가.
찢어지게 가난하던 하사용옹(73)은 일제시대부터 6.25전쟁 전까지 고물을 주워파는 넝마주의와 나무장사로 생계를 이끌었으며 6.25전쟁이후 결혼하여 자신은 머슴살이로 부인 신경복씨(67)는 식모살이로 가계를 가까스로 꾸려나갔다. 그러다 쌀 15가마로 주먹만한 땅을 마련하게 되고 자수성가를 이끌어낸다. 개인적으로는 폐결핵이라는 병마를 이겨내야 했고 가장으로서는 처자식을 책임져야하는 처지여서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고 1만2000평의 전답을 소유하는 인간승리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하사용옹이 단순히 시련을 극복하고 부자로 성공했다고 해서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웠을리는 만무하다.
자린고비로 소문난 하옹은 자신에게는 인색하지만 타인에게는 너그러운 시골 노인네다. 강외면 중봉리 마을회관을 건립하여 마을에 기증하였고, 현재의 강외농협 중봉리 분소를 열기위해 대지와 건물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강외초등학교의 불우아동을 돕는등 지역사회와 이웃을 위해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대부분 채소재배가 화교들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지던 시절부터 채소재배를 시작하여 마을을 비닐 하우스를 이용한 시설채소 농장으로 바꾸어 놓는등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이러한 하사용씨에게 송덕비를 세워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산제사를 지내면 더 오래산다는데 생전에 자신의 비문을 보았으니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사는 것이 당연할 터, 하옹은 이미 음덕을 다 받았는지도 모른다.

‘움막집 농장’ 경영

젊은 시절부터 지금의 성공신화를 이루기까지 하옹의 창업, 소득 플랜, 농가경영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은 우리 농법이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으로 수출되고 있지만 당시 57년에는 채소농사는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 하옹은 “왜 우리는 곡식 농사만 지어야합니까. 중국사람들 처럼 채소재배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라며 어른들에게 물었고 그때 마다 "채소재배는 기술이 있어야 되는 거여”라며 혼나기 일쑤였다.
그 시절 우리네는 부가가치가 낮은 곡식재배를 하고 있었으며 화교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채소재배를 해서 우리 농민보다 몇곱절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옹은 평소 갖고 있던 이러한 생각을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3년동안 머슴살이로 번 쌀 15가마를 창업자금으로 해서 기업이 되는 땅을 사고 채소재배를 시작했다. 더구나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 창호지에 콩기름을 발라 덮개를 만들어 보온을 하는 이름하여 '콩기름 창오지 하우스 농법'을 개발하는 등 신농법 개발에도 앞장섰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하옹의 채소 밭을 가리키면서 ‘식물이 볕을 봐야지 볕을 못보게 하면 어떻게 식물이 커’라며 비웃기 일쑤였지만 하옹은 자신의 신념을 믿었다. 노동집약형 곡식재배보다는 노동절약형 채소재배가 경쟁력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결국 그의 신념이 옳았다. 자신을 비웃던 사람들보다 10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며 그들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자본은 270평에 들어간 쌀 15가마가 전부였으며 노동력은 사주와 사주 부인이 제공하여 경영에 필요한 비용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때문에 움막집에 기거하면서 얻어진 수입은 대부분 저축되었고 새로운 밭을 사는데 쓰여졌다. 하옹은 57년부터 70년까지 매년 평균 20%씩 지속적으로 땅을 늘려 70년에는 3,100평을 확보했다. 이러한 눈부신 발전 위에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비닐 하우스 농장’ 을 경영하며 10여년간은 매년 41%의 소득성장율을 보이는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결과만을 놓고 볼 때 ‘움막집 농장’ 창업이후 하옹이 승승장구만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결정적 시련이 있었다. ‘움막집 농장’ 초기 폐결핵이 도져 3년간 움막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지경까지 몰렸을 때였다. 부인 신경복씨의 간병으로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결국 1970년부터 1980년까지의 하사용 농장 급성장기는 ‘움막집 농장’ 시절의 시련 위에 세워진 것이다.
시기적으로 '하우스 농장’의 급성장은 채소 가격이 10여년간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였다는 당시의 시장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옹의 노력없이 어찌 이러한 성과가 있으랴. 하옹은 중부권에서는 처음으로 비닐하우스재배를 시작한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일반농가와는 달리 겨울에도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차별화 된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이어서 소득 증대에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하옹이 본격적인 수익을 올리게 되었으며 동시에 정부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게되어 그동안 고생해 온 부인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옹은 집으로 돌아와 훈장을 걸어주면서 무일푼인 자신에게 시집온 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포상금으로 1000만원을 지급하려했으나 하옹은 이를 모두 받지 않았다.
하옹은 “1000만원이면 당시 20000평을 살 수 있는 돈 이었지만 받지 않았다. 일하지 않고 부자가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지금도 하옹의 집에는 전직 넝마주의의 경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온갖 고물로 가득하다. 집안이 농가인지 고물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사용옹 집은 고물상(?)

하옹은 몇년전부터 '빈컵 육묘사업'으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지금까지 여기에 사용한 종이컵 수는 약 50만개 정도, 앞으로 하옹은 100만개까지 채울 생각이라고 한다. 방안에는 반듯하게 자른 종이조각들이 가득하다. 보통 축의금과 조의금을 낼 때 쓰이는 재생봉투를 만드는 것인데 관공서와 아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다.
하옹은 “축의금 봉투는 한번 쓰고 버리는데 너무 아깝다. 폐지를 이용해도 결코 창피한 것이 아니다” 라고 자린고비의 생활자세를 대변해 주었다.
하옹은 스스로를 새마을 사업의 1인자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하사용씨의 이러한 자부심과 여러 언론 매체에 소개된 글, 하사용씨를 소재로한 ‘땀에 젖은 훈장’ ‘가난을 이긴 부부’ 등 5편의 새마을운동 홍보영화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얼핏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어 1970년대 새마을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라는 인상을 갖을 수 있다. 해서 기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종자입니까”
하옹은 아니라고 잘라말했다. “70년도에는 박대통령이 주는 포상금 1000만원도 받지 않았다. 단지 가난은 나의 적일 뿐이다. 현재 새마을 정신이 사그라든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박대통령의 추종자는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아껴야 한다. 아낄 것도 없어 아끼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없으면 안입고 안써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부른다면 당장이라도 북한에 가서 내가 살아온 과거와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북한 동포들이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다. 굶어죽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 밝히면서 “기업이든 농민이든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면 가난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며 경영의 차별화가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하옹은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기자에게 “젊은이도 부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그럼 열심히 일해야 한다” 라며 진부하다고 치부하기 쉬운 근면에 대해 재삼 재사 강조했다.
/곽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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