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혁 상 충북인뉴스편집장

   
최근 4·19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당시 청주농고 학생들의 가두시위 장면을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오세탁씨(당시 청주농고 교사)가 학생들의 시위모습을 직접 촬영한 귀중한 향토사 자료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펼쳐 든 플래카드에 적힌 글귀를 영 알아보기 힘들었다. 가까스로 농고 3학년 학생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박청홍씨(64·시인)를 통해 그 글귀를 확인했다.

‘독재정권 각성하여 신분보장하라’
46년전, 당시 고교생들의 한이 담긴 구호일텐데 느닷없이 ‘신분보장’은 무슨 말인가? 의아스러워 ‘청주의 4·19혁명’을 출판준비중인 박씨에게 다시 자문을 구했다. 설명은 짧고 명쾌했다. “아, 그거 강제동원 하지 말란 얘기지”

필자 역시 단박에 무릎을 쳤다. “아! 그거요” 두 사람간에 가로놓인 19년 시공의 차가 한순간에 걷혔다. 60년대초 고교생이나 70년대말 고교생이나 ‘강제동원의 추억’에 세대공감한 셈이다. 아마도 박선배(?) 세대에서는 자유당 정권의 반공궐기대회나 각종 기념식에 부단히 동원됐을 것이다. 필자의 세대는 기념식 ‘박수부대’ 이외에 무심천 풀깎기 등 본격적인 ‘노력봉사’까지 더해졌다. 청주시내 각 고교별로 무심천 일정 구간을 나눠맡아 한여름에 풀베기 작업을 벌인 것이다.

마침내 90년대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학생동원의 관행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초중고교는 교사·학부모단체가 교육현장의 감시자 역할을 하면서 불필요한 학생동원은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최근에 관제 또는 반관제 행사장에 단골로 동원되는 대상이 바뀌었다. 봄철을 맞아 야외 행사장을 쫓는 TV화면 속에는 어김없이 유치원생들의 행렬이 등장한다.

아이들의 맑은 표정과 웃음소리가 화면을 채우면 행사장 이미지는 만족과 즐거움으로 도배된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 밖에 서 있는 많은 아이들이 과연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까. 며칠전 청주 무심천에서 ‘난치병 어린이돕기 걷기대회’에 참가해 성금함 앞에 길게 줄을 선 미취학 어린이들의 모습이 신문방송에 보도됐다. 청주시어린이집연합회에서 주최한 행사이고 3000여명의 어린이가 ‘고사리손으로 정성껏 모은 성금’을 모금함에 넣었다고 소개했다.

누군 흰봉투를 들고, 때론 천원짜리 지폐를 흔들며 하품을 하며 기다리는 ‘고사리손’을 보며 민망스럽지 않을 어른들이 몇이나 될까. 청원군에서 해마다 열고 있는 오창단지 유채꽃축제도 미취학 어린이들의 단골 행사장이다. 어린이집연합회는 해마다 입장권을 떠맡기듯 관내 어린이집에 나눠주고 아이들은 3년째 그 행사장을 찾고 있다.

청주시의 공예비엔날레 행사장도 ‘병아리 손님’들이 전체 방문객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인파속에서 인간사슬처럼 손을 맞잡고 전시장을 끌려다니는(?) ‘병아리’들이 오히려 측은하게 보인다면 필자의 과민반응인가. 과연 행사 주최측에서는 해마다 찾아주는 ‘단골손님’들을 위해 눈높이를 맞춘 해설과 설명자료들을 갖추고 있을까.

어린이날을 맞아 ‘내일의 주인공’ ‘미래한국의 주역’들에 대한 연례적인 애정표현(?)이 넘치고 있다. 무슨 무슨 날을 통한 과잉집중은 역설적으로 평소 우리들의 부족함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아무리 수익과 흥행의 유혹이 강하다지만 미취학 어린이들을 볼모로 장사하려는 탐욕은 사라져야 한다.

자기 발언권이 취약한, 그래서 불만과 거부의 자기방어가 힘든 아이들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치열한 21세기 자본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맹목적 사랑보다는 인간에 대한 존중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철부지 아이들이라도 인간적 ‘신분보장’은 기본아닌가.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