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업계의 ‘대부’ 박학래 옹 ①
요리 집 ‘보이’출신 시의원 당선되자 화제
창씨개명 거부해 6개월 억울한 옥살이도
미명의 새벽 5시, 오늘도 박학래선생은 잠에서 눈을 뜨자마자 노구를 마다 않고 문밖으로 나선다. 먼저 아래층의 약수장을 둘러보고 봉명동의 학천건강랜드, 영동의 학천탕, 남문로의 제일탕 등 네 곳을 차례로 ‘순례’하기 위한 걸음이다.
목욕탕에 도착하면 밤새 아무 일도 없었는지, 청소는 잘 되어있는지, 수온은 적당한지 철야근무중인 종업원들에게 일일이 확인하는 것으로 박선생의 하루는 시작된다. 벌써 수십 년 째 이어져 오는 한결같은 스케줄이다.
현포(玄浦) 박학래(朴鶴來)선생. 사람들은 그를 목욕업계의 ‘대부’라고 부른다. 목욕업을 시작한지 40여 년, 청주 시내에 유수한 목욕탕을 네 군데나 운영하면서 목욕업의 ‘일갗를 이루고 있으니 ‘대부’라는 별칭이 그럴싸하다.
아닌게 아니라 목욕업은 박학래선생 필생의 가업(家業)이다. 다른 것들은 거의 타 지역에 앞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목욕탕에 관한 한 청주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있는 것은 목욕을 ‘문화’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박선생의 투철한 사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욕문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낼만큼 그는 목욕탕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목욕업을 필생의 사업, 아니 그보다 먼저 ‘천직’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는 ‘목욕문화’의 꽃을 피운 사람이다. 목욕은 몸의 때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세심(洗心)’이라는 것이 박선생의 지론이다.
박학래선생은 전국에서도 드물게 지방의원을 네 번씩이나 역임했을 정도로 지역 사회에 기여한 바 크다. 그러나 남다른 신념으로 온갖 역경을 이기고 파란 만장의 팔십 평생을 꼿꼿이 살아 온 개인사(個人史)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학래선생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꼭 네 해 뒤인 1923년 3월11일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덕성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가 관찰사를 역임했을 정도로 그는 이름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조부 박영진씨가 동학(東學)에 가담했다 왜병(倭兵)에게 죽임을 당하자 갑자기 가세(家勢)가 기울고 만다.
그가 고향을 등지고 부모를 따라 청주로 옮겨 온 것은 5세 때. 어려운 형편 속에 청주제일공립보통학교(현 주성초교)에 들어가 줄곧 1등을 하면서 도내 유일의 국비장학생으로 맡아 놓고 반장을 하지만 집안은 더욱 곤궁해져만 간다.
이 무렵 아침이면 홍조(紅潮)가 된 얼굴로 학교에 오곤 하는 학래에게 담임선생은 “어린 녀석이 술을 먹고 다닌다”고 호통을 친다. 양식이 없어 밥 대신 지게미를 먹고 술에 취한 사연을 담임이 알리 없었던 것이다.
박선생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른 두 살 되던 1955년 석교동 동장에 출마해 1표 차로 당선되고 이듬해엔 제2대 청주시의원에 최고득표로 당당히 당선된다. 기생집 보이출신이 시의원이 되자 시내가 온통 화제였다고 한다. 그는 60년 다시 시의원에 당선돼 2선 의원이 되지만 61년 5?16쿠데타로 의회가 강제 해산돼 임기를 채우지 못한다.
박선생은 64년 민정이양과 함께 창당한 공화당의 청원군당 사무국장으로 발탁이 되고 그 해 시영(市營)이던 제일탕을 낙찰 받아 꿈에 그리던 ‘목욕탕 주인’이 된다.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열 다섯 어린 나이로 ‘소년가장’이 되었던 학래는 세상에 나와 생전 처음 일자리를 얻었던 바로 그 목욕탕의 주인이 된 것이다. 너무도 감격스러워 그날 밤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얖>
김영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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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도 의기소침하는 저를 채찍하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