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공고 16일 첫 거리시위, 상고·농고 가세해
청주 최초 최루탄 발사, 최대 2500명 시위참여


4·19 혁명 46주년을 맞아 도내에서 처음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 청주농업고등학교 총동문회(회장 김전원)는 19일 오후 5시 모교 운동장 잔디정원에서 ‘4·19 학생혁명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던 졸업생 박청홍씨(64·시인)에 따르면 전국을 돌며 15개의 4·19 기념조형물을 현장답사했다는 것. 결국 청주농고의 기념비는 전국에서 16번째 기념물이 되는 셈이다.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와 독재정치에 맞서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농고 등 3개 고교 학생들이 거리시위에 나섰다. 청주고, 청주여고도 가두시위에 참여했으나 교내에서 자체적으로 봉기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고교생들의 집단시위에 뒤이어 청주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충북대도 일부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4·19 학생시위는 해방이후 청주시내에서 벌어진 최초의 가두시위였고 경찰의 최류탄과 시위대의 돌멩이가 맞선 치열한 거리공방전이었다. 46년만에, 청주농고 46회 졸업생들의 의지로 건립된 도내 첫 4·19학생 혁명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그날의 젊은 함성과 발걸음을 되짚어 본다. 본 기사는 앞서 소개한 박청홍 시인의 증언과 청주공고 재학시 4·19시위를 주도했던 최무웅씨(64·10회 졸업)가 회고한 글을 토대로 작성됐다. <편집자주>

1954년 3선 개헌안을 국회에서 전대미문의 ‘사사오입’ 표결로 통과시킨 이승만 정권은 독재 권력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58년 야당과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자유당 단독으로 통과시켜 공포정치의 시대를 맞았다. 마침내 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최악의 부정선거가 자행됐고 민심은 폭발직전에 이르렀다.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고교생 김주열 군의 주검이었다. 3·15 부정선거에 저항했던 마산 시민들은 재차 대규모 시위에 나섰고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4월16일>청주공고, 저항의 깃발을 들다
독재정권의 언론탄압 속에서도 이같은 끔직한 소식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고 청주지역의 고교생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움직임이 감지된 곳은 청주공업고등학교였다. 4월 15일 교내 이발소에 모인 박홍규, 최무웅 등 3학년생 7~8명이 마산사태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집단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이튿날인 16일 토요일 오전수업이 끝나고 하교하는 학생들을 청주역(현재 북문로 청석예식장 부근) 앞으로 모이도록 유도했다. 기차 통학생을 가장해 모이기가 좋았고 실제로 하숙생들이 토요일 기차를 타기위해 많이 몰려나왔다.

이날 청주역앞에 모인 공고생들은 300여명에 이르렀고 뒤늦게 낌새를 챈 경찰이 학생들을 에워싸며 해산을 종용했다. 결국 학생들은 5~6명씩 무리지어 대열을 이탈하면서 일부는 중앙시장을 거쳐 성안길 입구까지 200여m를 구호를 외치며 내달렸다. 하지만 경찰병력과 교사들이 완강하게 막아섰고 길거리에 흩어진 학생들의 모자와 책가방을 빼앗아가며 강제 귀가조치시켰다.

이때 30여명의 학생들은 청주경찰서로 연행됐고 경찰은 “학생들이 공부는 하지않고, 뭘 안다고 정치에 관여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결국 학교측의 간청으로 연행된 학생들은 2시간만에 훈방조치됐다. 하지만 오후 5시께 흩어졌던 학생들 가운데 100여명이 다시 청주역 앞으로 모여들었다. 맞은 편 역전파출소에서 무장한 50여명의 경찰들이 학생들의 동태를 주시하는 가운데 긴장된 침묵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열차 통학생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이날 청주공고 학생들의 거리시위는 종료됐다.

<4월 18일>상고·청고로 번져
다음날인 17일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소요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18일 월요일 아침 청주공고 운동장 조회는 분위기부터 살벌했다. 운동장 뒤편에 무장 경찰관들이 도열해 섰고 심지어 기마경찰까지 출동된 상황이었다. 학생들의 거리시위를 사전차단하기 위한 경찰의 무력시위나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적개심과 분노를 억누른채 조회를 마치고 각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로 들아가는 과정에서 일부 하급생들은 3학년생들에게 ‘선배님들은 경찰의 학교침입을 그대로 보고 있으란 말입니까?’라며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다.

마침내 경찰병력이 철수하고 3교시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자 3학년 교실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제 때가 왔다, 모두 궐기하여 나가자’ 순식간에 학생들은 복도로, 창문을 넘어 밀물처럼 운동장으로 빠져나왔다. 교사들이 교문을 막아섰지만 이미 대열은 터진 둑처럼 격랑이 되어 흘렀다. 청주공고 시위대는 북문로, 중앙로를 거쳐 청주여고로 향했다. 굳게 닫힌 교문앞에서 여고 학생들의 합류를 외친뒤 교동초교에서 도청 동문쪽으로 전진했다. 이때 지사관사 입구쪽에서 기다리던 경찰병력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의 중간을 갈라놓고 말았다.

경찰은 전방에 전진한 시위학생들에게 곤봉을 휘두리며 진압했고 쫓기는 학생들은 문화동, 서운동의 민가로 숨기도 했다. 후방으로 갈라진 시위대 150여명은 대성로쪽으로 움직이며 청주상고로 향했다. 공고 학생들은 수업중인 학교 복도에서 ‘함께 나가자, 독재정부 규탄하러 가자!’고 외쳤다. 별다른 반응없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때 한 학생이 ‘우리 데모대 반이 경찰에 붙들려갔다. 우리를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마침내 교실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청주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복경찰과 교사들의 제지를 뚫고 교문을 나선 공고-상고 학생대열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청주시가지를 지나는 철도길에서 돌멩이를 주어 주머니에 잔뜩 넣고 우암교회를 지나 청주고등학교로 향했다.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울려퍼지자 청주고 학생들도 교문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3개 고교의 학생들은 통일행진곡을 부르며 시내로 진입했고 한때 시위대는 2500명 규모의 도도한 물결을 이뤘다.

나눠줄 ‘삐라’도 흔들어댈 ‘깃발’도 한장 없이 ‘민주’와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청주시내를 압도했다. 고무된 학생 시위대는 시내 중심부인 도청 서문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경찰은 공보관(현재 상당공원 정문쪽)앞에 소방차까지 대기시킨채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시위대가 다가오자 경찰의 소방호스가 물을 뿜기 시작했고 수백명의 정사복 경찰들이 뛰쳐나와 곤봉과 카빈 개머리판으로 학생들을 구타했다.

오후 4시께 경찰의 무차별 진압작전으로 100여명이 현장에서 붙잡혔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민가로 숨거나 동공원, 우암산쪽으로 도망쳤다. 일부는 무심천을 건너 충혼탑이 있는 사직공원에 모여 대기했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시내 남궁병원으로 후송돼 응급치료를 받았다.

당시 청주공고 3학년생이었던 조모씨는 경찰곤봉으로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며 도망쳤다. 가까스로 서운동 민가 담장을 넘어섰지만 그만 장독을 깨고 말았다. 하지만 그 집 주인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서둘러 조씨를 방안에 숨겨주었다는 것. 피를 많이 흘려 남궁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조씨는 훗날 경찰 공무원을 천직으로 삼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100여명의 학생이 수감된 상황에서 시위대 학생간부와 교사들은 경찰에 석방을 요구했고 상호합의에 따라 전원 귀교조치됐다.

청주시내 3개 고교 학생들의 아무런 사전계획도 없이 불붙은 대규모 연합 가두시위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당시 엄혹한 공안경찰의 감시와 관제 학교의 틀속에서 학생들의 저항의식을 공권력과 대항해 표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1960년 4월 18일, 청주 한 가운데서 그 청년들은 해냈다.

<4월 19일>사전계획으로 전학년 나선 청주농고
18일 밤, 청주시 운천동 질구지 마을의 한 하숙집에 10여명의 청주농고 학생들이 모였다. 전날 시내 3개 고교의 거리시위 소식을 들은 조찬기씨 등 3학년생들은 한적한 하숙집에서 밤새 전단과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이튿날인 19일 아침, 교사들의 교무회의가 진행되는 틈을 타 3학년생들은 교실마다 찾아다니며 운동장에 집합하도록 유도했다. 전교생 500여명이 모이자 3학년 김익제군이 단상에 올라 부패와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학생시위를 벌이자고 역설했다.

이때 ‘우리도 무장을 해야 된다’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학생들은 농구실로 몰려가 삽, 선 호미, 괭이 등을 들고 나섰다. 뒤늦게 운동장에 나온 교사들이 만류했고 서정일 교장이 연단에 올라섰다. 학생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뜨거운 열기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서 교장은 “학생들의 정의감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 이탈없이 단결하고 몸이 상하지않게 제발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사실상 학생시위에 대한 완곡한 ‘격려사’로 받아들여졌다.

수백명의 학생들은 논길, 철도길을 건너 시내로 향했고 대성로로 접어들었다. 이때 교사들은 무력충돌을 우려해 학생들에게 ‘평화적인 시위를 위해서 농기구는 놓고가자’고 설득했다. 시위지도부 학생들도 이에 동조해 대부분의 농기구가 사전에 회수됐다.(잠시후 벌어질 경찰과 대치에서 농기구가 사용됐다면 최악의 살상극도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시내로 들어서자 학생들은 전단을 뿌리며 ‘부정선거 다시하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 ‘독재정부는 물러가라’ 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주성중을 거쳐 중앙초교까지 전진하는 동안 일부 경찰들이 모습이 보였지만 학생들의 돌팔매에 물러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중앙초교 뒷문쪽에 방어선을 친 경찰과 한차례 투석전이 벌어졌다. 부상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시위대와 경찰은 잠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노병건 교감이 진압 경찰들에게 다가가 ‘학생들이 다칠 수 있으니 제발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구호가 다시 터져나왔고 경찰의 최루탄이 대열 한 가운데 떨어졌다. 한차례 투석전으로 돌멩이가 떨어진 시위대는 저항할 수단이 없자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

일부는 민가로 숨어들었고 대부분 당산으로 도망쳐 다시 모였다. 학생보다 많은 경찰병력이 당산을 포위하듯 둘러쌌고 시위대의 기세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경찰간부와 교사들의 협상으로 학생들은 모두 중앙초교 강당으로 이동해 사실상 감금(?)당하는 처지가 됐다. 이때 청주대 대학생들의 시위대가 우암동까지 내려왔다는 전갈이 경찰에 전달됐다. 시내 고교생들의 가두시위가 마무리될 무렵에야 대학생들이 교문밖으로 나선 것이었다.

대학생 시위가 진정되자 경찰은 청주농고 학생들의 귀교를 허용했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에게 서 교장은 “태풍은 지나갔다. 정의롭게 우리의 뜻을 펼쳤으니 이제 공부에 정진하자”며 다독였다. 특히 사회담당이었던 오세탁 교사는 시위대의 모습을 낱낱이 카메라에 담아 지역 4·19역사를 조명하는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청주 4·19혁명사를 내년에 발간하겠다
청주농고 4·19기념비 산파역 박청홍씨


청주농고 총동문회는 60년 4·19혁명 당시 3학년 재학생이었던 46회 졸업생을 주축으로 2년 전부터 기념비 건립을 추진해왔다. 특히 46회 졸업생 박청홍씨(64·시인)는 상당액의 건립비를 희사하고 제작 기획을 맡는등 산파역을 담당했다. 높이 4m, 폭 50cm 크기의 기념비는 머리에 4마리 용 문양을 얹고 몸통인 비신(碑身)에는 소나무 1그루를 새겼으며 받침돌에는 9마리 거북을 조각해 4·19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했다.

기념비의 위치는 그날의 함성이 퍼져올랐던 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보이는 잔디정원에 자리잡았다. 2천만원이 넘는 제작비는 46회 동문들을 중심으로 기금을 모아 충당했고 학교측도 부지조성 등에 적극 나섰다. 특히 碑를 떠받치고 있는 아홉 마리의 거북이 조각은 한 덩어리 돌을 깎아 돋을새김한 것으로 이채롭다.

박씨는 “기념비의 형태는 四龍, 一松, 九龜로 하늘로 용천하는 용과 노송사이로 거북이 무심천쪽으로 기어가는 형상이다. 당시 3학년으로 시위를 이끌었던 우리 46회 졸업생들이 4·19혁명 46돌을 맞아 늦게나마 기념비 건립에 나서게 됐다. 동서고금의 세계사에도 학생들이 정권을 교체하는 혁명에 성공한 거사는 없었다. 당시 554명 재학생의 이름을 모두 비문에 새겨넣어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청주에서 4·19혁명 관련 자료, 사진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씨는 기념비 건립에 이어 내년에는 ‘청주 4·19혁명사’(가제)를 발간할 계획이다.

5ㆍ16쿠데타와 4ㆍ19 학생혁명의 불안한 ‘동거’
청주 중앙공원 ‘5·16혁명기념비’ 철거여론 높아져


청주농고총동문회의 ‘4·19학생혁명기념비’ 건립으로 청주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5·16혁명기념비’와 불화가 예상된다. ‘5·16 반란’은 30년간의 군사정권하에서 ‘5·16군사혁명’으로 미화됐지만 지난 93년 문민정부 수립직후 ‘군사쿠데타’로 역사적 규정을 받아 일반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따라서 청주시 중앙공원의 5·16 혁명기념비는 독재정권에 맞선 4·19혁명의 시민정신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뜻이다.

중앙공원 남쪽 잔디밭에 위치한 이 비석은 가로 50cm 세로 250cm 크기로 쿠데타 이듬해인 62년 5월 16일 세워졌고 건립자는 ‘10만 청주시민 일동’으로 표기됐다. 하지만 청주시 공원녹지과는 “중앙공원이 조성된 것이 1938년이기 때문에 62년도에도 시에서 관리를 했을텐데 516 비석에 대한 자료근거가 남아있질 않다. 어떤 경위로, 누가, 어느 위치에 초기 건립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답변했다.

취재결과 쿠데타 직후 군계엄령하에서 61년 12월 김삼증 중령이 청주시장으로 임명돼 64년 4월까지 3년 4개월동안 재직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중앙공원 ‘5·16 혁명 기념비’는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린 장본인인 군출신 시장의 뜻에 따라 건립됐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앙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로부터 청주성을 탈환한 주인공인 의병장 조헌 선생의 전장기적비(유형문화재)를 비롯해 의병장 박춘무, 승병장 영규대사의 전적비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군사쿠데타를 미화하는 기념비를 함께 세워둘 장소가 아니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도내에서는 지난 95년 역사정의실천협의회가 우암산 3·1공원 정춘수 목사 동상과 중앙공원 ‘5·16 혁명 기념비’의 철거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했었다. 하지만 당시 충북도와 청주시에는 정춘수 동상 철거에 대한 민원서류만 제출해 5·16 기념비의 처리문제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정식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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