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 표 정치부 차장

   
과거 총선연대가 ‘레드카드’를 들고 맹활약하던 시절 10여차례나 정당을 옮긴 이유로 낙선대상에 올랐던 모 정치인이 내뱉은 항변은 우리나라 정치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냈다.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적도 있고 당이 이름을 바꾼 경우도 상당수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시대 상황까지는 모르겠지만 근 10여년 동안 양당 구도를 이루고 있는 여야 모두 환골(換骨)이 없는 탈태(奪胎)만을 거듭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조없는 정치인도 문제지만 정치판에 구조적 모순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기초의회에까지 정당공천이 확대된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철새들이 양산되고 있다. ‘정치신인들에게도 자신을 알릴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예비후보 등록제가 더불어 시행되면서 정당지지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에 예비후보들이 무더기로 몰렸다가 공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탈락을 예감한 인사들이 ‘탈당 불사’의 기세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기초의회 예비후보의 경우 2~3명을 공천하는 선거구에 무려 7~8명씩이나 몰렸으니 공천잡음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8월 5.31 지방선거 경선 등에 대비해 책임당원을 모집했을 때 5만여명이 접수된 것은 그래서 ‘재앙의 예고편’이었다.

공천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 신인들이 알에서 부화되자마자 ‘철새’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현 상황을 지켜보면서 유권자들은 더 깊은 정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텃새임을 자부하던 인사들 마저 철새로 ‘변이’가 이뤄지고 있고 정당 역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둥지를 제공하는 등 정치철학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됐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골수를 자처하며 “(한나라당이) 당을 떠났던 인사들을 되받아들인 것에 자괴감을 느낀다”던 권영관 전 충청북도의회 의장은 “차라리 한창희 현 시장을 공천한다면 받아들이겠다”던 마지막 애당심을 사흘만에 접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충주시장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오효진 청원군수의 입당 때 당의 정체성을 운운하며 떠들썩했던 열린우리당도 권 전 의장의 입당에는 일제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충주시장 선거에 나설 후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해명이었다.

한나라당 증평군수 공천 경쟁에서 자존심이 상한 유명호 현 증평군수도 한나라당에 탈당계를 냈지만 무소속 출마와 여당 입당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신생군인 증평 발전을 위해서는 여당 입당이 바람직 하지만 무소속으로 나가는 것이 오히려 선거에 유리하다”는 것이니 여당으로서는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지는 멘트다. 그래도 밤낮으로 사립문은 열어놓고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다 잠이나 설치지 않는지…

이쯤되면 정치는 코미디 수준이지만 전혀 유쾌하지 않다. ‘지방선거에는 아예 정당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는 것도 그래서다.

사실 정치의 핵은 정당이고 정당의 이념은 선명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공천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유권자들도 선택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치르게 되고 그래서 선택에 신중해지는 것이 A급 시나리오다. 당도 ‘그 나물에 그 밥’이고 사람도 오락가락하는 마당에서는 제대로 된 선택도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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