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특성상 한계 있었으나 행사기간 동안 서로 정 나눠, “남녀평등 얼마나 이룩했는가”에 북측 “여성 해방됐다” 주장

지난 10월 16∼17일 금강산 김정숙휴양소에서 열린 ‘남북여성통일대회’에 다녀오자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그 곳 여성들은 어떻게 사는가” “거리풍경은 어떠했는가” “양측간에 솔직한 대화가 오고갔는가.”
그러나 가기 전부터 정치·체제·사상 등과 관련한 질문을 받으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북측 대표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금을 그어 이 대회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남북회담이 아닌 남북교류라는 성격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네킹처럼 서있는 군인

북에서 예쁘고 젊은 여성들을 부산 아시안게임 응원단으로 대거 내려 보낸 것처럼 남북여성통일대회에도 내로라하는 여성들이 참가, 한 단면만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남측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북측에서는 조선민주여성동맹 간부, 교수, 인민회의 대의원, 병원장, 방송국장, 출판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실제 여기서 본 여성들은 대부분 차림새가 괜찮은 엘리트 계층이라는 느낌이 드는 반면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보이는 사람들은 마르고 활기가 없어 보였다. 이들은 간혹 남측 대표단이 손을 흔들면 열에 세, 네명이 답할뿐 나머지는 무표정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행사장 곳곳에 서있는 군인들도 작고 말라 남측의 중학생 정도 체격밖에 되지 않았다. 군인들은 말을 걸어도 대꾸 한마디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마치 마네킹 같았다. 가끔 아이들이 학교를 오고 가는 모습도 보였으나 역시 영양상태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용 자체를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해서 누구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북측이 내놓는 음식을 보고는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첫 날 북측이 제공한 도시락과 같은 날 저녁 금강산여관에서의 만찬은 정성스레 준비한 것이기는 했으나, 재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풍요속에서 음식이 귀한 줄을 모르고 살아온 탓인지 그 곳의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김치도 남측 고춧가루의 1/3 밖에 안넣은 듯 하얗고 싱거웠다.
이런 대회를 금강산이 아니고 평양이나 다른 도시에서 했더라면 일반인들을 가까이 접촉할 수 있었을텐데 김정숙휴양소는 철저히 일반인과 격리된 곳이었다. 어떤 북측 대표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고 말해 특별한 사람만이 이용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지난해 8월 평양에서 열렸던 8·15 남북통일대축전시 일부 참가자들의 과도한 행동이 문제된 후 평양에서 민간교류를 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 주변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온 정보였다.
그래서 그 유명한 옥류관 냉면과 평양 단고기집의 영양탕도 ‘그림의 떡’ 이었다. 평양을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맛있다고 칭찬하는 옥류관 냉면에 대해 북측 대표들도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북측의 한 대표에게 남한에도 옥류관이 있다고 하자 즉각 날아온 답이 “그 맛이 같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측에서 김밥과 함께 내준 샘물 ‘아달산’은 조선의 시조왕인 단군이 마시던 물이라고 했다.

조선민주여성동맹, 최대의 여성단체

북측 여성들은 조선민주여성동맹이라는 여성단체에 모두 가입돼 있다. 이 단체는 광복직후 생긴 것으로 역사가 꽤 깊었다. 최근에 조선여성협회라는 단체가 한 개 더 생겼는데 여기에는 원하는 사람만 자유롭게 가입한다는 것이 북쪽 참가자의 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처럼 여성단체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민주여성동맹의 간부들은 상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들 중의 일부는 매우 활달했다. 어느 자리에서나 큰 소리로 의견 표현을 잘하고, 오락시간에는 춤도 잘추고 노래도 썩 잘 불렀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민족답게 북측 대표들도 익숙하게 가무를 즐겼는데, 한 여성 대표는 “일하다가도 잠깐씩 체조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며 이런 생활이 일상화돼 있다고 말했다.
통일교육원이 펴낸 ‘북한방문 길라잡이’라는 책을 보면 북한에도 청소년 전용 노래방이 있다. ‘화면반주 음악실’로 불리는 노래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1990년대 초 평양에 처음 설치됐고, 평양 청년중앙회관에 250석 규모로 마련된 노래방은 청년중앙회관 대중정치교양과에서 운영하며 근로청년, 대학 및 전문학교 학생, 청소년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우리처럼 대중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방북직전 통일교육원에서 교육할 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는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함없이 부르는 것을 삼가라” “김일성 주석 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 사진, 말씀판 등을 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동을 하지마라”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이 북한지도자를 모독하는 것으로 오인받아 체류기간 동안 말썽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금강산 곳곳에는 실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조국통일의 력사적 위업 수행을 위한 강령적 교시를 주신 곳’이라는 등의 말씀판이 있었는데 이를 만지거나 기대면 즉각 북측 안내원이 뛰어와 나무랐다. 남측의 한 대표는 어떤 여성의 가슴에 달려있는 김일성 뱃지를 만져보자고 했다가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에게 대답질?”

남측의 대표들이 그 곳 여성들에게 궁금해 한 것 중의 하나는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돼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더욱이 방북한 사람들이 여성운동단체에 관여하는 사람들이어서 이런 질문은 빼놓을 수 없었다. 북측 대표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여성들이 일찍 해방되어 여성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여성의 희생을 강조하는 노래 ‘여성은 꽃이라네’를 부르고, 남편을 ‘주인’이라고 칭해 우리 측 대표들을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가사분담, 호주제 폐지, 여성의 정치참여 등 현실적인 여성문제를 가지고 낱낱이 고발하고 이런 것만을 전문적으로 해결하는 여성운동단체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 가정내 성평등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고, 직장내 성차별을 얼마나 해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남녀평등의 개념을 약간 다르게 해석하는게 아니냐는 것이 남측 대표들의 중론이었다. 그들은 1940년대 중반, 국가에서 남녀평등권법령의 날을 제정한 만큼 이에 관한 얘기를 더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지만, 법 제정 이전에 피부로 느끼는 성평등 문제를 듣고 싶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을 이야기할 때도 북측 대표들은 남성에게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며 “관리위원장, 지배인 등의 간부를 맡고 있는 여성이 많다”고 자랑했으나 간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어떤 작업환경에서 일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 대회에 참가했던 충북여성민우회 변지숙 대표는 “수예전시회에서 북측 남성에게 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남자라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보아 수예는 여성만 한다는 식의 성역할 고정관념이 철저한 것 같았다”며 “어느 유명한 여성계 인사가 탈북여성에게 남쪽의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묻자 ‘남쪽의 여성들은 남편에게 대답질을 하는데 그것이 가장 신기하고 속이 시원했다’고 말하고 탈북남성은 ‘여성들이 남성과 함께 술자리에 앉아있는 것과 담배피우는 것이 신기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북쪽 여성은 남성에게 대들거나 따지지도 못하고, 담배도 절대 피울 수 없는 사람들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어와 사상의 차이 심각

이들과 함께 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언어와 사상의 차이였다. 김정숙휴양소 운동장에서 부문별 모임을 하는데 말끝마다 ‘위대한 김정일 지도자께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라는 표현을 써 말을 자르자 “남측에서 온 사람들이 지도자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며 발끈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모든 공을 ‘위대한 지도자’에게 넘겼다. 평양산원의 한 관계자도 여성들이 경애하는 지도자 덕분에 산전 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완벽한 치료를 받는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부문별 상봉모임시 경제파트에서 있었던 일화 한 토막. 남측 대표 중 한 사람이 “남측은 자기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사업을 하지만, 북측은 모두 고용인들”이라고 했다가 북측 대표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그들은 “고용이라는 단어가 기분나쁘다. 남의 밑에서 마지못해 일하는 것이 고용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폄하해서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이렇게 단어 한 개를 가지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서 만난 북측의 한 여성기자는 “대학 어문학부 출신들이 기자가 되는데 지식인층에 속한다. 집필이 주업무이고 사진도 직접 찍는다”며 평양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조금만 깊이 있는 질문을 하면 웃음으로 대신했다. 어느 신문사에서 왔느냐고 하는 물음에도 그는 답하지 않았다.
북측 여성들은 모두 똑같은 제복을 맞춰 입고 통일대회에 참석했다. 짙은 파랑색의 점퍼와 바지, 그리고 곤색 운동화가 공식 복장이었다. 이 옷을 입을 때 외에는 한복을 입었는데 빨강, 분홍, 연두, 노랑 등 원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간혹 70년대 우리 어머니들이 입던 ‘깔깔이’ 라는 천으로 한복을 해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북한여성들은 평소 취미생활로 수예를 많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행사기간 중에 열렸던 수예 및 미술전시회에서는 한 땀 한 땀 바늘로 만든 작품을 보여 주었다. 금강산에 갔을 때도 그랬고 곳곳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것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이런 절경을 수놓은 작품들이 상당히 많았다. 안내를 하고 있는 한 북한여성은 “학교에서도 수예를 배우고, 수예연구소도 있다. 집에서는 아이들 옷이나 베개 같은 데 수를 많이 놓는다”고 설명했다.

헤어질 때는 얼싸안고 울어

한편 쓰레기를 버리면 안된다는 교육을 단단히 받고 간 금강산은 정말 깨끗했다. 빈병 한 개, 휴지 한 개가 떨어져 있지 않았다. 평소 금강산 관광을 갔다온 사람들로부터 금강산에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문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산에 오르기 전 받은 교육은 상당히 엄격했다. 그 곳에 구르는 돌 한 개, 단풍 한 개도 가져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계곡에는 하얗고 넓적한 바위들이 쌓여 있고 등산로는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다.
가을의 절정을 맞아 붉게 타는 금강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바위도 웅장함 그 자체였다. 각양각색의 단풍잎은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지 ‘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금강산 입구의 곧게 자란 미인송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한 안내원은 금강산이 올 여름 태풍 루사의 피해로 길이 끊기고 허물어져 아직도 복구중이라고 말했다.
‘2002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는 “과거 역사에서 대립과 갈등의 주역이 남성이었다면 21세기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여는 주역으로는 여성들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본성적으로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 실제 이번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도 이 부분에 대해 모두 동의했다. 북측의 한 대표는 또 “여성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며 누구보다 평화를 원해 앞으로는 어떤 이유로도 전쟁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과 북의 대표들은 통일대회 폐막식 후 서로 정을 나누는 행사를 가졌다. 북측 대표들이 두 줄로 서있고 그 가운데를 우리측 대표들이 지나가며 일일이 악수를 나눴는데, 서로 얼싸안고 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통일되면 꼭 만나자”는 것이 누구 입에서나 자연스레 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같이 뛰고, 춤추고, 노래하며 정이 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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