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으로 열차탄뒤 서울역서 미아돼
옥천 김충환씨(39) TV프로그램통해 가족 상봉

<옥천신문>하늘이 저리도 파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았고, 누런 황금들판은 가을 산들바람이 부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들판으로 스며들어간 사람들은 알이 통통한 벼이삭을 수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974년 그 해 가을 10월 어느 날, 오후 1시10분쯤 일곱 살배기 꼬마 충환(39·경기도 양주시 덕정동)이는 기차놀이를 하고 싶은 충동을 못이겨 경부선에 올랐다. 조금만 타다 다시 내려오는 기차를 타고 집에 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만 그 안에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잠을 깨어보니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서울역이라고 알리는 안내방송만 연신 들렸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로부터 자그마치 32년이 지난 2006년 2월8일 아침 KBS방송국 아침마당(진행 이금희, 손범수)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스튜디오. 일곱 살배기 충환이는 마흔을 코앞에 둔 5톤 카고 크레인 운전기사로, 한 가족의 가장으로 잃어버린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32년만에 고향을 찾은 김충환씨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옥천신문 사진제공>
7남매 중 다섯째, 자신을 업어 키웠던 미화(45) 누나도 손을 잡고 꼭 같이 다녔던 누이동생 정화(37)도, 듬직한 큰형 종환(51)과 둘째형 지환(47)도, 같이 개구지게 놀았던 명환(42)이 형도, 얼굴도 보지 못했던 막내 윤환(31)이와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오한기·이원면 강청리)를 만나 감격에 겨웠고, 2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이원이란 명칭을 몰랐드랬어요. 플랫폼에 큰 나무가 있었던 것과, 강가와 인접해 있었다는 것만 머리에 남아 있었어요. 서울역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의정부에 있는 보육원에 들어가서 도망치다 잡혀오고 하는 것을 계속 반복했죠. 엄마가 보고 싶고, 우리 형, 누나, 동생도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기차 여행을 수도 없이 가기 시작했어요. 30년 동안 그것을 해왔던 겁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으려고, 고향을 찾으려고요.”

졸지에 고아가 된 충환씨는 술만 먹으면 고향 타령을 했다. 98년 결혼한 아내 이미경씨도 남편의 고향이 그려질 정도로 그의 고향을 그리는 술주정은 반복됐다.

구두닦이도 해봤고, 외항선원 일도, 사료 배달도 했다. 안 해본 것 없을 정도로 고생만 죽도록 했다. 명절 때만 되면 그는 반미치광이가 됐다. 남들 다 가는 고향 산천도 잃어버리고, 그리움으로 외로움으로 점철됐던 30년 동안의 삶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가족들도 그를 찾느라 수시로 방송국에 제보도 했고, 경찰서에 신고도 했다. 아버지는 늘상 명절때만 되면 충환이를 찾아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곤 했단다.

그러던 지난 1월 말 지금은 청주에 사는 누나 김미화씨가 딸에게 잃어버린 외삼촌이 있다고 넋두리를 했더니 딸이 외삼촌을 찾겠다며 인터넷에 제보를 올렸다. 그것이 지난 2월1일 KBS 아침방송 전파를 타게 됐고 만남으로 이어졌다. 충환씨는 고향 집에 들러 엄마가 손수 만든 고추장 맛을 느끼면서 고향을 조금씩 기억해 냈다.

“어떻게 찾은 고향인데요.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입니다. 그 동안 잃어버렸던 세월 보상받으려면 어머님께 효도하고, 형제들 자주 찾아보고 그래야죠.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며 떨고 있는 손이 어머니의 주름진 손에 잡혀 이내 따뜻해졌다. 어렵게 고향의 품 안에 안긴 그는 인생 최대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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