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결심에 고향 뒷산 수없이 찾았다”

1월17일 밤 10시30분, 하이닉스·매그나칩 청주공장 정문 앞에는 야간교대를 위해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지각을 면하기 위해 택시에서 내린 뒤에도 잰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들은 굳게 닫힌 정문 옆에 있는 경비실 쪽문을 통해 대낮 같이 불을 밝힌 공장 안으로 속속 사라졌다.

출근길 노동자들의 발길이 끊기자, 정문 앞 담장과 가로수에 을씨년스럽게 만장이 매달린 매그나칩 하청노동자들의 농성장에는 쥐죽은 듯 적막이 감돌았다. 100여명의 노조원 가운데 80여명이 서울 본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숙농성을 위해 상경했고, 20여일째 단식농성을 해오던 박순호 직무대행 마저 영양실조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

칼바람을 막기 위해 출입구를 잔뜩 여민 천막을 열고 들어가니 1월18일 이원종 지사와 면담을 준비하는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서원대 김연각 교수, 여성민우회 남정현 대표, 충북참여시민연대 김홍장 협동처장 등 10여명이 머리를 맞대고 직접대화를 성사시키기 위한 원칙과 방법에 대해 숙의 중이었다.

만장을 철거하고 대화분위기를 조성하는 쪽으로 중재할 수는 있지만 ‘상급기관(민주노총)을 무조건 배제시키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난감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전교조가 지지농성을 벌이고 있는 천막을 지나 또 다른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상경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 너댓 명이 청주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소주잔이 오가면서 마음도 열리고
등산용 램프 불빛에 어슴푸레 비친 노동자들의 모습은 그림자가 어른거려 어둡고도 침울했다.
입사 10년째라는 이승호(36·가명)씨는 “회사 측이 무엇을 원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구석 구석 내 손길이 닿았던 장비들이 지금도 걱정이 된다. 노조도 같이 죽자는 것은 아니다. 또 회사도 아닐 거라 생각한다”며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절절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농성 초기에는 농성장 내 음주를 엄격히 규제했지만 타는 속을 달래려 한 두 잔씩 마시다 보니 지금은 용인되고 있다는 말에 기자의 사비로 족발을 시켜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잔이 오가다 보니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들이 실타래 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이씨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결심에 고향 뒷산을 찾아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다는 절망감에 소나무에 줄을 매달았다가 처자식 생각에 마음을 돌리곤 했다”고 말했다.

이씨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정성우(33·가명)씨는 조금 더 씩씩했다.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다시 이전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정씨는 또 “이 같은 생각은 책이라면 만화책도 안 읽는 내가 공부를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싸워오면서 알게 된 것”이라며 “하청노동자라서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인간적인 차별은 참기어려운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씨와 정씨는 “비정규직 확산을 반대하는 투쟁은 사실 우리가 할 것이 아니라 정규직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어쩔때는 차라리 다 비정규직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며 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받았던 감정적 차별에 대해서도 서운함을 털어놓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 똑같은 명절선물이 지급되는 것에 대해 정규직들이 항의해 그들은 12만원 짜리, 우리는 6000원 짜리 선물세트를 받았다”는 이씨의 항변에서 그들의 가슴 속에 박힌 응어리가 얼마나 크고 아픈 옹이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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