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언니덜, 이번 명절에는 등골 빠지는 일 없기를….” 추석전날, 출정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非婚후배의 E메일을 받으며 다녀온 名節戰場 뒤끝엔 수다도 무성했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체제속에서 소외감이 증폭되는 명절을 맞는 해가 거듭될수록 생겨나는 여유와 자신감, 마치 아이들이 주먹을 불끈쥐며 “어쭈구리, 한판 붙어볼래 “하며 상대의 도전에 대응하듯 나의 자존과 영역을 침해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방어할 태세가 되어 있지만 굵게 패인 시어머님의 주름에서 여성으로서의 동지애와 연민이 조청처럼 진득하게 묻어나기도 하는 그런 감정, 맨몸으로 남의 집에 들어가 수십년후면 그 집 살림살이를 통째로 접수하는 자들은 한국여성들뿐이라는 어느 여성학자의 역설처럼, 주인화 과정의 노동이란 상념은 많아도 딱히 客과 같은 구차한 서글픔만은 아니라는 것이 올 명절에 대한 나의 논평이다.
이번 명절에도 식구수에 맞춰 바리바리 챙겨놓으신 보따리속엔 어김없이 청국장이 들어있었다. 1970년대 내 나이 10대시절, 군단위 읍내농협에 근무하시는 아버지의 점심을 상전밥상 차리듯 정성껏 준비했던 어머니는 늘 온집안에 묘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는 청국장을 즐겨 올렸었다. ‘국적있는 교육’이라 씌여진 여중교문 간판을 넘나들며 카레라이스니 스크렘블드 에그니 하는 가정과목의 서양음식을 새롭고 선진적인 문화의 상징인양 열심히 외워대기도 했었다.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교정한켠 벤취에서 구르몽과 전혜린을 읽으며 난 엉뚱하게도 청국장으로 상징되어지는 구질구질한 한국, 시골, 여성, 전통, 가난 등의 단어가 풍기는 모든 후진성을 냉소하며 중심부에 대한 외경을 키워갔었다.
황량한 공원의 비맞은 낙엽만큼이나 칙칙했던 80년 그해 가을, 허름한 중국집에서 불어터진 자장면을 앞에 두고 ‘전환시대의 논리’를 감동적으로 설파했던 남자선배는 빨간루즈와 하이힐을 신고 나타난 내 친구의 쁘띠부르조아성을 심하게 질책했다. 낡은 바바리와 검은 뿔테가 잘 어울려 러시아 혁명가를 연상케하는 그를 잠시 사모, 숭배했던 나는 애꿎은 착한 쁘띠친구에게 우리안에 내재돼 있는 자잘한 욕망따윌랑은 민족경제수립과 민중의 당파성을 견지하는데 헌납하자고 열변을 토해냈었다.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하면서도 이념몰락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능동적으로 적응해온 진보적 여성운동에 파묻힌 나의 90년대는 쏜살같이 진행됐다. 머릿속에 소화가 되든말든 뻔질나게 들락댔던 20대와는 달리 신기하게도 책방출입이 완전정지됐다. 무식함 속에서도 봇물같이 쏟아지는 숱한 이야기와 내적고민이 여성운동의 정치적 내용으로 존중받게되면서 나는 비로소 자궁에 안착된 태아처럼 조직과 개인적 삶의 편안한 일치에 안도감을 갖게되었다. 30대 가을의 기억은 대충 이랬다. 단풍이 고운 가을들녘에서 콤바인이 쓸어간 논두렁에 엎드려 남겨진 볏단을 정리하면서 ‘왜 밀레의 그림속에 나오는 농부의 평화를 한국의 농민은 느낄 수 없는걸까’를 되뇌인 기억정도라고나 할까, 육아와 농사보조라는 육체노동에 따른 에너지 충원을 위해선 삼겹살과 김치찌개가 제격이라면서 열심히 고기를 먹어댔었다.
이제 청국장 얘기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엄마들과 생협운동이라는 걸 시작하면서 먹을거리 공부를 하게 됐다. 성인병,아토피,각종 암등 현대인의 갖가지 질병의 근원이 결국은 食原病에 다름아니라는 것과 자연속에서 본연의 생명을 지켜낸 건강한 먹을거리와 우리 전통발효식품의 과학적 우수성을 알게 되면서 어느덧 내 밥상위에는 전엔 기피했던 야채, 호박잎과 막장, 콩과 나물들, 그리고 청국장이 빈번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된장과 나물이 있어야 속이 편하다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입맛을 나도 모르게 닮아가고 있던 것이다. 정말이었다. 30여년만에 다시 찾은 청국장은 실로 깊은 맛을 내고 있었다. 내게있어 청국장과의 관계회복은 나를 에워싼 모든 후진성에 대한 긍정이자, 참다운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 가을, 가을걷이행 나들이에서 나는 맵지않은 고추와 호박잎을 숭숭썰은 청국장에 우리콩으로 만든 두부를 넣어 끓여 이 음식의 위대성과 과학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밥이 곧 하늘이며 건강한 먹을거리를 회복시키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 또한 우주속에서 자연과 인간, 인간의 인간의 상생과 조화를 지켜나감이 사람살이의 기본이치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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