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를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가 한국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월드컵에서의 1승을 뛰어 넘어 무려 4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그를 연호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나 이같은 표면적인 이유보다는 소위 히딩크 신드롬이라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속 시원하게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히딩크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에겐 히딩크 이전에도 분명히 뚝심과 믿음, 그리고 개개인의 능력을 무제한으로 끌어올리는 슬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기존의 틀을 과감하게 깨버린 히딩크식 철학을 통쾌하게 여기게 된 것은 우리 안에 이미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히딩크가 한국을 떠난 지 어언 두 달 남짓 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많은 참담함을 겪었다. 두 번이나 총리가 결정되지 못했고, 살갗을 파고드는 듯 한 오뉴월 땡볕을 그리워 할 정도로 지겨운 비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가슴 뭉클한 남북축구가 열렸고, 아시안게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와중에 독선과 권위로의 회귀에 히딩크가 끼어있다는 점은 우리를 더욱 허전하게 한다.
나는 히딩크가 자랑스러운 만큼 박항서도 좋아한다.
그가 묵묵히 2선에서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을 이끌었다는 점으로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박항서를 좋아하는 까닭의 가장 큰 비중은 그가 우리와 똑같은 한국인이라는데 있다.
결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에 충실한 우리네 평범한 가장을 쏙 빼닮았다는 점에서 좋다.
그리고 조건없이 대표팀을 아시안 게임 우승으로 이끌겠다는 봉사정신 또한 마음에 든다.
힘들면 다른 사람을 채우고, 어렵다 싶으면 다른 방법으로 일을 풀어가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히딩크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체득한 새로운 생각을 진정한 우리 것으로 만들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는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위 엘리트에 의해 선도되어 가는 세상 역시 그 소수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평범함으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주연의 자리에서 밀려있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역할에 충실한 빛나는 넘버 투, 넘버 쓰리에게서 희망을 읽어야 한다.
짧은 추석 연휴에도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 조상과 부모의 존재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보통사람들에게 더욱 밝은 달이 비추는 한가위가 됐으면 싶다. 부디 이런 평범함으로 우리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자신감이 히딩크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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